대법원이 4년5개월 심리 끝에 전자부품 연구원 행정직이던 A씨의 임금피크제를 무효로 결론지은 것은 A씨에 대한 회사의 행위가 ‘합리적인 이유 없는 차별’이라는 최종 판단 때문이다. 아무런 대상(代償·다른 것으로 갚아주는 것)조치 없이 “나이가 들었으니 일단 급여를 깎고 본다”는 식의 임금피크제는 앞으로 허용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날 대법원 판결로 퇴직자들의 임금 소송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정년 연장 여부, 업무량 축소 정도, 급여 삭감 폭 등이 각각 중요하게 따져질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26일 A씨의 임금피크제를 무효로 판단한 직후 “정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일정 연령 이상 근로자의 임금을 삭감하는 형태의 임금피크제 효력에 관해 판단 기준을 최초로 제시했다”고 밝혔다. 임금피크제로 인한 고령자 임금 삭감이 과연 고령자고용법이 금지하는 ‘합리적인 이유 없이 연령을 이유로 차별’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선 앞선 판례가 없었다. 대법원은 2017년 12월 사건을 접수한 뒤 심층 논의를 거듭했다. 심리 결과에 법조계는 “과거 정부가 임금피크제 도입을 권고했던 데 비춰보면 충격적이다”고 했다.
대법원은 회사가 55세를 넘긴 A씨의 임금을 크게 삭감할 명분이 있는지 살폈고, 그의 실적은 명분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회사가 제출한 자료에 따르더라도 55세 이상 정규직 직원들의 실적 달성률은 51~55세 직원들보다 높았다. 이는 “인건비 부담을 완화하고 실적 달성률을 높인다”던 회사의 임금피크제 도입 목적과 맞지 않는다는 판단으로 이어졌다. 대법원은 실적 자료를 거론하며 “55세 이상 정규직 직원들만을 대상으로 한 임금 삭감 조치를 정당화할 만한 사유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A씨의 급여가 일시에 대폭 하락했지만 정작 대상조치는 없었다는 점도 대법원이 ‘이유 없는 차별’을 판단한 근거가 됐다. A씨가 일한 연구원에서는 임금피크제 적용을 받는 이들의 업무 목표가 낮게 잡히거나, 그에 따라 평가를 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A씨의 월급은 적게는 93만원, 크게는 283만원 줄어들었다. 회사는 명예퇴직제도를 대상조치라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불이익을 보전하는 조치로 볼 수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노동사건 실무를 다뤄온 여연심 변호사는 “정년을 늘리지 않고, 업무를 줄이지 않고, 그러면서도 ‘왜’를 말하지 못한 채 급여가 삭감됐다면 차별적이라 본 판단”이라고 풀이했다. 그간 임금피크제가 적용되는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급여는 줄었는데 업무는 동일하다”는 이른바 ‘동일노동 동일임금 위배’ 반발이 많았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법률원장인 정기호 변호사는 “청년 고용 등 도입 목적 타당성이 크거나 불이익의 정도가 작을 때에만 임금피크제가 유효하다고 판단되는 단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 변호사는 “예컨대 급여의 10~20%는 몰라도, 그보다 과도한 삭감은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