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령 대상은 한반도 주둔 일본군… 조선엔 해방 약속

입력 2022-05-26 03:08
1947년 미국에서 열린 제1차 유엔총회에 참석한 한국대표 임병직(가운데) 임영신(오른쪽)이 기자석에 앉아 있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해방 이후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과연 점령군인가. 이런 주장은 아직도 계속된다. 하지만 미국은 처음부터 한반도를 점령해 식민지로 만들 계획이 없었다. 미국은 영국 중국과 함께 1943년 11월 27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한국민의 ‘일본에 의한’ 노예 상태에 유의해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되게 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비록 ‘적당한 시기에’라는 모호한 표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은 한반도를 궁극적으로 일본에서 해방해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로 만들 것을 약속했다.

1945년 9월 7일, 연합군사령관 맥아더는 포고령 제1호에서 위에 언급한 카이로선언의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 “오늘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고 발표했다. 여기서 점령 대상은 한반도에 주둔하는 일본군이다. 또한 이 점령의 결과로 조선인의 “인간적, 종교적 권리”가 보장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포고령은 일본에는 항복을 요구하는 것이며 조선에는 해방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1945년 9월 18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이런 미국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일본군의 항복은 자유를 사랑하는 영웅적 국민의 해방을 선포하는 것”이라며, 한국인들은 일본군의 가혹하고도 긴 탄압 가운데서도 “민족 해방의 염원”을 잘 지켜냈다고 격려하면서 “이제 새로운 해방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아울러 트루먼은 일본 통치자들은 쫓겨가고 있으나 일시적으로 유임된 일부 일본인들은 미국 점령군을 위해 봉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미국 정부의 입장은 1945년 10월 ‘태평양 방면 최고사령관 맥아더에게 보내는 최초의 기본 훈령’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훈령에는 “한국에 대한 군사적 점령으로 귀하는 적국 영토의 군사적 점령자로서 관례적 권한을 부여받는다”고 언급됐다. 미국 정부는 맥아더에게 과거 조선을 점령했던 일본과 일본군에 대한 지배권이 있다는 것을 통보했다. 동시에 이 훈령은 “귀하의 민정 업무는 카이로선언의 규정에 따라 군의 안전이 보장되는 한, 최대한으로 한국을 해방된 국가로 대우하는데 기초해야 할 것이다”라고 명시한다. 여기에 다시 조선에 자유와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선언이 등장하고 있으며, 미군은 한국에 대해서는 해방된 국가로 한국인에 대해서는 자유를 찾은 국민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맥아더 포고령 제1호’ 문서로 “미군은 조선 인민을 일본에서 해방하기 위해 38도선 이남의 일본군을 점령한다”고 밝히고 있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당시 미국은 유엔과 함께 전쟁 지역을 전략지역과 비전략지역으로 구분했다. 전략지역이란 연합군이 직접 전쟁한 지역을 말하며, 비전략지역은 ‘전쟁으로 적국으로부터 분리된 지역’을 말한다. 그리고 전략지역은 연합국(안전보장이사회)의 직접 관리하에, 비전략지역은 유엔의 신탁통치 아래에 두기로 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입장을 달리했다. 미국은 한국을 비전략지역으로 ‘전쟁으로 적국에서 분리된 지역’으로 보았다. 반면 소련은 한국을 전략지역으로써 자신들이 싸워 뺏은 지역으로 보고 있었다. 소련은 1945년 8월 9일 대일전을 선포했고 곧바로 한반도에 진격했다. 소련은 북한은 자신들이 일본군과 싸워 점령한 지역이며, 따라서 이 지역은 자신들이 직접적인 권한을 가진 지역이라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서 자신들의 체제를 강요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소련군은 점령군으로서 여성들을 약탈하고 재산을 빼앗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해방군이라 선전했다. 1946년 11월 소련 외상 몰로토프는 유엔에서 조선을 ‘전 적국’이라 표현했는데, 이런 표현은 소련의 한반도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대해 이승만의 친위단체인 민족통일 총본부는 “세계에 오해를 일으킬” 주장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유감을 표시했다.

미국과 소련의 이런 한반도 인식은 1947년 가을, 한반도 문제의 유엔총회 이관 문제에서 잘 드러난다. 미국은 미소 공동위원회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 이 문제를 유엔총회로 이관하려고 했다. 미국은 근본적으로 한반도는 비전략지역이기 때문에 유엔이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련은 한반도는 자신들의 점령지역이기 때문에 안전보장이사회가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련은 여기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한반도 문제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 문제를 유엔총회에 이관했다. 유엔헌장의 정신에 따르면 유엔총회는 모든 문제를 다룰 수 있었다.

해방 직후 한반도에 진주한 소련군과 미군은 다 같이 일본군에 대한 점령군이었다. 하지만 한국인들에 대한 태도에서 이 두 나라는 뜻이 달랐다. 소련은 겉으로는 해방군이라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싸워서 점령한 지역이므로 이 지역의 모든 권한은 자신들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비록 그 포고문에 ‘점령’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것은 일본군에 대한 점령을 말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카이로선언을 따라서 한국을 자유·독립국으로 만들고, 한국민을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된 국민으로 대우하고자 했다.

박명수 서울신대 명예교수·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