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지방시대] 20년 버려진 학교·300년 된 동백나무… 작은 마을 먹여 살린다

입력 2022-05-23 22:22
제주시 애월읍 어음2리 주민들이 1999년 폐교한 어음분교를 개조해 카페와 게스트하우스로 만든 ‘어음분교 1963’의 모습. 제주=문정임 기자

마을과 도시가 지속 가능한 성장을 고민하면서 오랫동안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졌던 지역 자산이 소비자의 발길을 끄는 중요한 가치가 되고 있다. 돌담과 바다가 만나는 제주 풍경이 감탄을 자아낸 것은 이미 오래. 그 돌담 아래 자라나는 제주산 당근과 동네 사람들이 대대로 소중하게 가꿔온 나무들까지 제주 마을의 고유한 것들이 새로운 수익원이 되고 있다.

점심시간이 막 지난 21일 오후, 80가구가 사는 제주 서부의 한 중산간(해발 200~600m) 작은 마을이 아이들의 소리로 활기가 가득했다. 3층 높이 쯤 되어 보이는 거대한 팽나무 아래로 트램폴린을 타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땅따먹기를 하며 노는 아이들 무리 사이로 차를 마시거나 삼삼오오 가벼운 식사를 하는 어른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제주 애월읍 어음2리에 있는 어음분교 옛터의 풍경이다. 1963년에 세워져 1999년 폐교 되고 20년 가까이 방치돼오던 학교를 마을회가 카페와 펜션 ‘어음분교1963’으로 변신시켰다.

돌담을 정비하고 낡은 교실엔 커피기계를 들였다. 운동장 나무 아래엔 테이블을 놨다. 놀이터도 만들었다. 곳곳에 타자기와 옛날 교과서, 주판을 놓아 이곳이 학교였음을 알게 했다. 한쪽에 걸린 7080세대의 교복은 누구든 입고 기념 촬영을 할 수 있다. 운동장 한편엔 추억의 통시(분뇨 저장공간에 돼지우리를 둔 제주의 재래식 화장실)도 설치했다.

마을 사무장을 비롯해 동네 주민 4명이 근무하고 있다. 2019년 개업 이후 입소문을 타면서 매출액은 매년 30%씩 증가하고 있다. 시설에 재투자하는 비용과 인건비를 제외한 수익은 마을 기금으로 쓴다. 주민들은 어릴 적 다니던 학교가 다시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공간이 된 것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폐교는 찾는 이들에게도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과 시골 정경이 주는 고요한 휴식이 있다. 김미정 사무장은 “할머니집 같은 농촌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을 때 아이들과 어음분교1963을 많이 찾는 것 같다”며 “시내의 화려한 건물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무언가가 분명 있다”고 설명했다.

매년 4월 제주에선 빨간 동백꽃 배지를 단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제주의 한 화백이 4·3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동백꽃 지다’ 연작을 발표하면서 4·3의 상징이 됐기 때문이다. 동백은 절개나 슬픔을 은유하는 꽃으로 여겨진다. 12월에 개화해 1월에 가장 아름답다. 봉오리째 떨어진 동백꽃이 탐방로 바닥을 붉게 물들인 모습은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장관이다.

서귀포 남원읍 신흥2리는 동백나무 숲과 300년을 함께 했다. 1700년대 광산 김씨 일가가 정착하며 방풍용으로 심은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동백나무숲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제주도 지방기념물로도 지정됐다.

서귀포시 남원읍 신흥2리 동백마을 주민들이 동백꽃을 들고 즐거워 하는 모습. 제주관광공사 제공

동백과 오랜 세월 함께했지만 동백마을의 이름을 알리게 된 건 주민들이 연구회를 만들어 마을을 더욱 동백마을답게 만들면서다. 주민들은 동백나무를 활용한 사업을 구상했다. 지역에서 나는 동백열매를 원자재로 납품하고 마을 방앗간에서는 동백기름을 연간 300병 한정 생산하고 있다. 동백기름을 이용한 음식·비누 만들기 등 가족 단위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상품을 내놓으며 6차 산업도 야심 차게 이끌고 있다. 동백나무숲을 걷기 위해 마을을 찾는 방문객도 늘고 있다. 연구회는 창립 이후 1000그루가 넘는 토종 동백나무를 심어 동백마을의 브랜드를 가꿔가기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고 있다.

서귀포 대정읍 무릉2리에는 몇 년 전 문재인 전 대통령 방문으로 더 유명해진 ‘무릉외갓집’이란 친근한 이름의 마을기업이 있다. 품질이 우수한 농산물을 생산해도 농가에는 낮은 수입만 돌아오는 고질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릉2리 농부들이 직접 출자해 소비자와 농가를 직접 연결하는 새로운 유통 구조에 도전했다. 초창기에는 조합원 농가에서 제공하는 상품 종류가 다양하지 않아 상품 꾸러미를 구성하는 데 어려움도 있었지만, 가입 농가가 늘고 마을기업 운영에 관심과 노하우를 가진 이들의 도움이 이어지면서 13년 째 성장 중이다.

이들의 활동은 농산물 배송에만 그치지 않는다. 온라인 사이트도 문을 열었다. 지역 농산물을 이용한 음식 만들기 프로그램과 감귤 따기 체험, 제주도 농업에 대한 교육도 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는 오프라인 상점 겸 카페를 통해서도 소비자들을 만나고 있다. 고객은 주로 대도시에 거주하는 30~50대 주부들이다. 소비자들은 꼭지까지 딸려온 산지 직송 농산물이란 점에 가장 큰 점수를 준다. 무릉2리 농산물에 대한 만족은 제주의 또 다른 생산품에 대한 신뢰로 이어진다. 마을 농가의 자부심이 커진 것도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제주 마을기업들이 성장의 발판을 다져가는 데에는 관련 기관의 도움도 컸다. 어음2리가 잡초가 무성했던 폐교 활용에 엄두를 낼 수 있었던 데에는 한국농어촌공사와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의 지원이 있었다. 무릉외갓집은 행정안전부와 제주도의 여러 지원 사업에 선정되며 예산과 인력을 지원 받았다. 신흥2리 동백마을은 제주관광공사가 지역 관광 활성화를 위해 만든 여행상품 ‘카름스테이’(작은 동네를 뜻하는 제주어 ‘카름’과 머문다는 뜻의 영어 ‘stay’를 결합한 용어, 제주 마을여행 통합브랜드)의 한 곳으로 선정돼 올여름부터 마을 이름을 전국에 본격적으로 알릴 수 있게 됐다. 현재 제주에는 41개의 마을기업이 있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