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고물가 상황에서 공정거래위원회가 내부적으로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 공정거래위원장을 비롯한 내부 직원들은 물가 관리 기관이 아니라는 인식이 뚜렷한데, 한 고위급 인사가 물가 관리 방안 아이디어를 내라고 직원들을 압박하는 것으로 전해져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20일 기재부 1차관이 주재하는 물가관계차관회의를 앞두고 공정위 실무진들은 관련 아이디어를 쥐어짜고 있다. 한 고위 간부가 각 국·과에 물가 관리를 위한 아이디어를 내라고 독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가가격·출고량 담합 규제를 담당하는 카르텔조사국뿐 아니라 시장감시국·유통국·시장구개선국 등 국장·총괄과장들이 ‘무한 회의’에 시달리고 있다.
공정위 한 공무원은 19일 “이명박정부 시절 공정위가 물가 전쟁에 뛰어들었던 게 두고두고 발목을 잡고 있는데 그때의 악몽이 떠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2011년 김동수 당시 공정위원장은 “공정위가 물가 기관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직원은 사표를 쓰라”며 선봉장에 섰다.
그러나 공정위는 스스로 물가 관리 기구가 아니라는 정체성이 강하다. 공정위 한 고위공무원은 “공정위의 역할은 올바른 시장 정책을 만드는 것이지 직접적으로 특정 물품의 가격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다른 공무원도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 경쟁을 위한 본연의 업무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물가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홍남기 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관계부처장관회의에서 조성욱 공정위원장을 빤히 쳐다보며 “물가를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더니 조 위원장이 “우리는 물가 잡는 기관이 아니다. 위법 정황이 있어야지만 조사한다”고 답한 일화가 회자되기도 한다.
공정위 관계자는 “물가 관리 기구가 아니라고 위원장이 확실하게 선을 그었는데도 아이디어를 짜내야 하는 상황이 참 난감하다”고 말했다.
세종=신재희 기자 j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