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리포트] “5·18은 광주만이 아닌 전국적 신군부 저지 투쟁이었다”

입력 2022-05-10 20:51
1980년 5월 ‘광주’ 이외 전국에서 일어났던 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 규명 움직임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5·18 민주유공자단체 전국협의회’ 대표들이 ‘광주밖’ 전국의 5·18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신청서를 공동 접수하고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5·18 민주유공자단체 전국협의회 제공

5·18민주화운동이 다가왔다. 광주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5·18민주화운동 42주년 기념행사 준비가 분주하다.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는 국가 기념식은 5월 18일 광주에 있는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다. 같은 날 부산 서면에서도 기념식과 문화공연이 개최된다. 하루 전인 17일 전북에선 기념식과 함께 고(故) 이세종 열사 추모식이 함께 진행된다. 서울과 대전 대구 강원 춘천 등지에서도 42년 전 신군부의 내란 행위에 항거했던 투쟁과 희생자를 기리는 행사가 잇따라 열린다. 5·18 정신을 기리는 위해 짧게는 20여년, 길게는 40여년째 이어져 온 기념식이다. 그러나 올해는 각 지역에서 더욱 의미 있고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최근 1980년 5월 광주 이외의 지역에서 일어났던 전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재조명 움직임이 활발하다. 지난해 1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특별법 개정 이후 뜨거워졌다. 법 개정으로 5·18의 공간적 범위가 광주 일원에서 관련 지역으로 확대됐다. 시간적 범위도 ‘5·18 당시’에서 ‘관련한 시기’로 확대됐다.

5·18 유공자 단체들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성과였다. 관련 단체들은 “많이 늦었지만 당연한 결정이었다”고 환영했다.

이후 지난해 5월 부산울산경남 5·18 민주유공자회의 제안으로 5·18 민주유공자 단체 전국협의회가 다시 모여 적극 논의에 들어갔다. 이 협의회엔 전북과 서울, 대구·경북, 대전·충청, 강원 지역 등 6개 단체가 동참하고 있다.

이들은 5·18민주화운동을 특정 지역에 묶어 지역 사건으로 한정하려는 시도를 극복하고 전국화의 노력에 힘을 보태자고 뜻을 모았다. 12월14일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를 방문하여 ‘광주 밖 전국의 5·18’ 진상 규명 신청 공동접수와 기자회견을 했다.

사진은 2020년 5월17일 전북대에서 열린 ‘5·18 40주년 기념식과 고 이세종 열사 40주기 추모식’ 모습. 전주=김용권 기자

전국협의회의 1차 조사 결과, 1980년 5월 당시 광주 이외 전국에서 4명이 사망하고 군부 정권에 붙잡혀 간 사람중 이름이 확인된 이만 682명에 이른다. 전국협의회는 지난 1월 국회에서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함께 발표회를 갖고, 이 같은 결과를 발표했다.

우원식 의원은 이날 “광주 밖 전국의 5·18을 조명하는 까닭은 더 이상 5·18을 광주 안에 가두지 않기 위함”이라며 “군부독재의 억압을 뚫고 국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전국의 시민의 투쟁이 곧 5·18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윤 5·18 민주유공자단체 전국협의회 회장은 “1980년 전국 곳곳에서 자행된 내란세력의 불법 행위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의 기초가 되고, 5·18을 역사에 올바로 자리매김하는 소중한 첫걸음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해 5월 상황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1일 서울과 대전에서 대학생 시위가 일어난 것을 시작으로 매일 전국 대학가에서 집회 시위가 있었다. 첫날 대전에선 충남대생 5000여명이 비상시국토론회를 연 뒤 3000여명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14일엔 서울시내 21개 대학 7만여명의 학생이 영등포로터리와 신촌로터리 등에서 “유신잔당 물러가라” 등을 외치며 가두시위를 했다. 지역에서도 11개 대학에서 3만여명이 시위를 했다.

15일엔 참가자가 급증하고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려퍼졌다. 서울역 광장에 35개 대학 20만여명이 운집했다. 지방 24개 대학에도 4만여명이 집결했다.

5월 18일~27일 광주항쟁 기간과 그 이후에도 전국 각처에서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연대투쟁과 전두환 등 신군부 내란 세력 규탄 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7월 26일에는 부산의 임기윤 목사가 경찰에 연행돼 강압적인 수사를 받다가 3일 뒤 사망했다. 전국협의회는 1980년 당시 광주밖에서도 수천명의 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 42주년을 앞둔 10일 현재 각 지역 관련 단체들은 시·도별로 기념행사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행사장과 길거리에 현수막과 안내문이 내걸리며 추모 분위기가 높아가고 있다.

가장 활발한 곳은 전북지역이다. 40여 사회시민단체가 모인 전북행사위원회는 올해 처음으로 기념학술제를 연다. 20일 전북대 박물관에서 열리는 학술제의 주제는 ‘5·18 첫 희생자 이세종과 전북지역 5월 항쟁’이다.

5월20일 전북지역에서 처음 열릴 예정인 ‘5·18 기념전북학술제’ 안내문.

전북행사위원회는 코로나19로 인해 2년간 열리지 못했던 네 번째 5·18 청소년가요제를 연다. 전북대 박물관에서 16일부터 다음 달 30일까지 ‘이세종 열사 유품 사진전시회’도 진행한다. 전북대는 지난달부터 1억2900만원을 들여 이세종 광장을 새 단장했다.

부산에선 16일 ‘163명의 증언, 부산의 5·18’이라는 주제로 행사가 열린다. 대구 대구백화점 앞 민주광장과 강원 춘천시청 대회의실에서도 기념식이 열릴 예정이다.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지난 3일부터 5·18 민중항쟁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현재 전국 5·18 진상조사가 올해 말까지 진행되고 있다.

“만시지탄입니다. 하지만 이 같은 노력으로 ‘폭도’로 고립돼 있던 광주의 희생과 투쟁이 정당성을 인정받고 더욱 높게 평가 받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부산대 4학년이었던 김종세 부산경남울산 5·18 민주유공자회 회장은 “1980년 5월은 ‘광주’와 ‘광주 밖’이 연대해서 내란세력들에 맞서 싸운 전국적인 투쟁이었다”며 “이제 이 투쟁의 실상을 파악해서 5·18의 진상에 담아야 할 과제가 놓여 있다”고 말했다.

김완술 5·18민주화운동 전북동지회 회장
“이세종 열사 사망 진상 명확히 드러나지 않아”

“이세종 열사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국 최초의 희생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1998년에야 희생자로 인정받고 다음 해 5·18 국립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그가 죽은 지 실로 19년 만의 일이었죠.”


김완술(62·사진) 5·18 전북동지회 회장은 10일 인터뷰에서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 열사가 사망하던 날의 진상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1980년 전북대 2학년이었던 김 회장은 5월 17일 밤 이세종 열사 등 40여명과 함께 학생회관에서 농성중이었다. 그러나 자정을 기해 쳐들어온 공수부대원들에게 붙잡혀 경찰서에 연행돼 갔다.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사망했고, 그 이름이 이세종이라는 것을 들었다.

“전북에선 민주인사들과 함께 해마다 5·18민주화운동 기념식과 이세종 열사 추모식을 열고 있습니다. 또 5·18 정신과 의미의 세대 전승을 위해 2017년부터 청소년가요제를 진행하고 있지요.”

김 회장은 “2008년 ‘뜨거운 날들의 투쟁’이라는 제목으로 전북지역 운동사 구술 사료집을 내기도 했다”며 “그러나 아직도 이 열사는 ‘첫 희생자’라고 공식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1980년 5월 민주화를 향한 지역 열기가 뜨거웠다고 회고했다. 전북대를 비롯 원광대와 전주대, 군산대 등에서도 거의 매일 시위가 열렸다. 15일엔 대학생과 시민 등 2만여명이 전주역 앞에서 가두시위를 했다.

김 회장은 “무자비한 광주 진압이 자행되던 27일엔 전국 고교 최초로 전주 신흥고생 1500여명이 운동장 시위를 하고 6월17일엔 휴교뒤 재등교한 전북대 의대생들이 시내에서 침묵 시위를 하는 등 자랑스러운 투쟁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아시다시피 5·18은 ‘광주사태’ ‘폭동’ 등으로 왜곡되고 장소 또한 ‘광주’로 축소돼 왔지요. 그러나 현재는 ‘민주화운동’으로 정의되고 관련 4법 모두 5·18법으로 명명되고 있습니다.”

김 회장은 “5·18은 결코 광주만의 일이 아니다. 전국적인 내란저지 투쟁이었다”며 “1980년 ‘광주 밖’ 투쟁에 대한 진상이 제대로 규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주=김용권 기자 y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