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적’ ‘타는 목마름으로’ 등을 쓴 저항시인이자 1960~70년대 네 차례 고문과 투옥을 경험하고 평생 그 후유증에 시달렸던 민주화 운동가, 동학과 생태주의에 기반한 생명사상가였던 김지하 시인이 8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토지문화재단 관계자는 시인이 최근 1년여간 투병하다 이날 오후 4시쯤 강원도 원주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전했다. 시인과 함께 살던 둘째 아들 김세희 토지문화재단 이사장 내외가 임종을 지킨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1941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김영일(金英一)이다. 김지하는 필명.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했으며 69년 ‘시인’지에 ‘황톳길’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70년 그의 대표적인 평론인 ‘풍자냐 자살이냐’를 발표했고 그해 12월 첫 시집 ‘황토’를 출간했다.
초기 시집인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등에서는 군사독재와 양극화된 사회 현실에 대한 울분을 서정적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담시인 ‘오적’ ‘비어’ 등은 판소리 스타일을 이용한 통렬한 풍자시로 권력과 정면으로 맞섰다.
고인은 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옥고를 치른 것을 시작으로 네 차례 구속됐다. 70년 ‘사상계’에 ‘오적’을 발표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됐다. 이 사건으로 ‘사상계’는 정간됐다. 72년에는 ‘비어’로 다시 입건됐다. 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체포돼 군사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80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그의 전체 투옥 기간은 8년이 넘는다.
김지하는 2016년 시집 ‘중심의 괴로움’ 복간에 부친 글에서 “오적, 황톳길 이후 이십 년 가까이 저항, 폭로, 비판, 슬픔, 외로움 그리고 가난과 투옥이 내 작업의 거의 모두이었다”고 회고했다. 또 “87년의 변혁 이후 분명 나는 변했다”면서 “그사이 정신병도 앓았다. 고통과 가난이 내 주변을 휩쌓았다”고 썼다.
김지하는 감옥에서의 공부를 바탕으로 80년대 생명사상가로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살림’ ‘생명’ ‘예감에 가득 찬 숲그늘’ ‘동학 이야기’ 등이 그 책들이다. 2002년 김지하의 사회사상, 철학사상, 미학사상을 총정리한 ‘김지하전집’(전 3권)이 간행됐다.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김지하는 90년대 이후 ‘변절’ 논란에 휩싸였다. 91년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기고한 게 결정적이었다. 당시 김지하는 명지대생 강경대의 죽음 이후 이어진 연쇄 분신 행렬에 대해 운동권 세력들이 자살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후 김지하는 진보 진영으로부터 배신자로 취급받는다.
2012년에는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여성 대통령이 등극하면 일시에 모권이 회복되고 후천개벽 세상이 된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은 당선 후 그의 원주 집을 찾았다.
김지하는 2018년 3·1절 보수집회 개최자로도 이름을 올렸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내가 어떻게 우파의 리더가 될 수 있겠소”라며 “나는 우파도 좌파도 아니오. 중간파도 아니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걸 내 사명으로 하는 사람이오”라고 말했다. 이 인터뷰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하고 리영희 백낙청 신경림 등 대표적인 진보 인사들을 비난했다. 김지하의 이 같은 극단적 변심이 고문 후유증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고인은 명지대, 한국예술종합학교, 동국대, 원광대, 건국대 등에서 석좌교수를 지냈다.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 로터스 특별상과 국제시인회의 위대한 시인상, 브루노 크라이스키상 등 국제적인 문학상을 다수 받았다. 1975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대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이산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받았다.
고인은 73년 소설가 박경리의 외동딸 김영주와 결혼했다.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이었던 부인은 2019년 향년 73세로 별세했다. 그를 챙겨주던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김지하의 병세는 급격히 악화됐다. 그는 말년에는 치매 증세를 보였고, 저술은 물론 사람들과의 만남도 피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으로는 두 아들이 있다. 빈소는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