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지난해 건너뛴 두산아트센터의 두산인문극장이 올해 다시 시작하며 한국 사회의 주요 이슈인 ‘공정’을 키워드로 내걸었다. 그 첫 번째 프로그램으로 연극 ‘당선자 없음’(포스터)이 10~28일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무대에 오른다. 이 작품을 쓴 극작가 겸 연출가 이양구(48)를 최근 만났다.
“두산아트센터가 2020년 ‘공정’이란 테마로 희곡을 의뢰했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제헌헌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관심이 있었어요. 제헌헌법이 지금의 한국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까요. 공정의 정의가 판단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해방 직후 한국에서 처음으로 사회적 기준을 만든 제헌헌법을 연극 소재로 택했습니다.”
1948년 7월 17일 공포된 제헌헌법은 그해 5·10 총선거로 꾸려진 제헌국회의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입안한 뒤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이 작가는 속기록 등 제헌헌법 관련 각종 문헌뿐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 관계된 회고록, 평전 등 비공식 자료까지 참고해 ‘당선자 없음’을 집필했다. 제헌헌법 제정 이야기와 이를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PD와 비정규직 작가 등 방송국 사람들의 이야기, 두 축으로 구성된다.
“제헌헌법을 연극으로 만들어 관객과 소통할 수 있을지 고민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선 법이나 제도 같은 것을 소재로 다루는 작품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코로나19로 공연이 지난해에서 올해로 연기돼 희곡을 계속 수정할 수 있었습니다. 초고에선 ‘국가 만들기’라는 큰 이야기에 중점을 뒀는데, 수정하면서 회사 운영방침과 개인의 계약 등 일상 이야기의 비중이 높아졌습니다.”
이 작가는 법학도를 꿈꾸며 충남대 법대를 6학기 다녔지만, 연극을 하고 싶어 뒤늦게 중앙대 연극과에 진학했다. 2008년 희곡 ‘별방’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대학로의 젊고 재능있는 연극 연출가 동인 집단인 ‘혜화동1번지’ 5기 동인으로 2011~2014년 활동했다. 김수희 윤한솔 등이 소속된 혜화동1번지 5기 동인들은 해방공간, 국가보안법, 해고노동자 등 한국 사회와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을 선보였다. 혜화동1번지가 주축이 돼 2013년 개최한 단막극 페스티벌 ‘아름다운 동행’은 대학로 젊은 연극인들이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전환점이 됐다.
이 작가도 평택기지촌 여성을 다룬 ‘일곱집매’(2012년), 노동자 파업을 그린 ‘노란봉투’(2014년), 블랙리스트 의혹을 풍자한 ‘씨씨아이쥐케이’(2016년), 노조파괴 전문 법무법인의 실체를 고발한 ‘작전명: C가 왔다’(2017년) 등 사회성 강한 작품을 집필해 왔다. 연출가로서도 고공농성 노동자의 가족을 그린 ‘이게 마지막이야’(이연주 작·2019년), 사회적 약자와 부동산 문제를 다룬 ‘집집: 하우스 소나타’(한현주 작·2021년) 등을 연출했다. 이들 작품 가운데 ‘일곱집매’ ‘노란봉투’ ‘이게 마지막이야’ 등은 여러 연극상을 받았다.
“제 초기 작품들은 사회성보다 서정성이 강한 편입니다. 혜화동1번지 동인 시절 ‘아름다운 동행’ 페스티벌을 계기로 사회적 이슈를 다룬 이후, 솔직히 말해 제가 자발적으로 썼다기보다 의뢰가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 작가는 ‘서정적인 작품도 잘 쓴다’고 하지만,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연극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의 사회성 짙은 연극은 노동현장 등 한국 사회의 그늘진 곳에 대한 깊이 있는 취재에 공감 가는 내러티브를 더해 높은 완성도를 보인다.
‘당선자 없음’은 이 작가가 희곡만 쓰고 극작가 겸 연출가 이연주가 연출했다. 2014년 세월호 천막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이게 마지막이야’ 등에서 좋은 호흡을 보여줬다. 이 작가는 “‘당선자 없음’은 관객에게 무거운 작품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는데, 이연주씨가 연출을 맡아 풍자적이고 재밌게 풀어냈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