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십시오. 인간은 이렇게 H라고 뜹니다. 인간에게만 방출되는 방사성원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감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한테서는 그게 나오질 않습니다.”
“지금 무슨 소리들을 하시는 거예요? 이상한 기계 하나 가지고 와서 무슨 장난을 치시는 거예요.”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최 박사의 아들 철이는 어느 날 제복을 입은 사람들에 의해 미지의 수용소로 끌려간다. 죄목은 ‘휴머노이드 등록법’ 위반. 인간을 닮은 로봇(휴머노이드)이 고도화되면서 겉모습만으로는 더이상 인간과 식별하기 어려운 수준에 도달한다. 그래서 휴머노이드는 모두 신고를 하도록 하는 법이 제정되는데 철이는 등록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휴머노이드라고? 철이는 혼란에 빠진다.
‘작별인사’는 김영하(54)가 ‘살인자의 기억법’ 이후 9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소설이다. 철이를 주인공으로 인간과 로봇의 경계가 흐릿해진 세상, 혹은 인간과 로봇이 통합되는 세상을 그린다. 인간, 휴머노이드, 클론(복제인간), 동물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다. 인간은 유전자 조작과 장기·신체 이식, 웨어러블 기기 등을 통해 기계를 닮아간다. 휴머노이드는 감정과 의식까지 획득하며 갈수록 인간을 닮아간다. 인공지능의 폭주가 데려다 줄 우리의 근미래일 수 있다.
공간적 배경은 평양이다. 한반도 통일 이후 낙후된 북한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평양은 휴머노이드 특화도시로 지정됐다. 테크기업들이 몰려들고 다종다양한 휴머노이드가 개발된다. 철이 아빠가 일하는 휴먼매터스는 최고의 기술기업이다. 철이는 휴먼매터스 랩 안에서 성장했다.
갑자기 시작된 철이의 모험은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가르는 경계는 어디인가를 묻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이 모험에 인간인 선이, 휴머노이드인 민이가 동행한다. 작가는 존재의 위기에 처한 철이의 모험담을 경쾌하게 전한다. 하지만 철이의 통과해 나가는 질문들은 가볍지 않다.
필멸하는 인간으로 사는 것보다 영생하는 기계가 더 나은 게 아닐까, 뇌를 인공 뇌로 갈아끼운다면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지난 기억을 완전히 리셋하거나 신체를 통째로 바꿀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인간과 로봇의 우정은 가능한가….
이 소설은 한 구독형 전자책 서비스 플랫폼의 청탁을 받고 2020년 발표한 경장편을 개작한 것이다. 420매 분량이던 당시 원고를 2년에 걸쳐 다시 고쳐 써서 800매로 늘렸다.
김영하는 작가의 말에서 “마치 제목이 어떤 마력이 있어서 나로 하여금 자기에게 어울리는 이야기로 다시 쓰도록 한 것 같은 느낌”이라며 “이제야 비로소 애초에 내가 쓰려고 했던 어떤 것이 제대로, 남김 없이 다 흘러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김영하는 인공지능과 로봇의 시대가 던지는 여러 질문들에 답하면서 인간을 보다 깊게 정의하고,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새롭게 보게 한다. 그는 우리가 인간의 한계라고 느껴왔던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하는 듯 하다. 어쩌면 그것들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필멸하는 인간들을 위한 송가였다. 생의 유한성이라는 배음이 깔려 있지 않다면 감동도 감흥도 없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이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절실했던 것이다.”
이번 소설은 김영하의 첫 SF 소설이기도 하다. 그동안 다뤄온 기억이나 정체성이라는 주제와 연결돼 있지만 그의 이야기는 이제 인류의 멸절이나 미래로 향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의 경험이 이런 변화에 영향을 준 것인지 모른다. 앞으로 김영하의 소설이 이 방향으로 더 나아갈지도 궁금해진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