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5월 1일 식민지 조선에서 첫 어린이날 행사가 열렸다. 아동문학가 윤석중의 책 ‘우리나라 소년운동 발자취’에 당시 모습이 기록돼 있다.
“그날 낮 1시에 소년 회원들이 대를 짜가지고 종로, 탑골공원, 전동, 교동, 광화문 등 여러 갈래로 나뉘어 노래를 부르며 일본인들이 모여 살던 남촌만 빼고 두루 돌면서 ‘어린이의 날’과 ‘소년보호운동’ 선전을 했다.”
올해 100주년을 맞은 어린이날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불려 나오는 이름은 소파 방정환이다. 방정환은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고 잡지 ‘어린이’를 발행했다. 천도교소년회가 주도한 첫 어린이날 행사 배후에도 당시 도쿄에서 유학하던 방정환과 그가 만든 어린이운동모임 색동회가 있었다. 이번에 출간된 ‘어린이를 노래하다’는 방정환이 아니라 그의 옆에 늘 서 있던 한 인물에 포커스를 맞춘다. 동요 작곡가 정순철이다.
정순철은 두 살 위인 방정환과 함께 천도교소년회 활동을 했고, 비슷한 시기에 도쿄 유학을 하며 색동회를 창립했다. 방정환이 3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늘 함께했다. 둘의 관계에 대해 방정환의 아들 방운용은 생전에 “방정환 있는 데 정순철 있고, 정순철 있는 데 방정환 있다”고 말했다.
정순철은 전 국민이 아는 노래 ‘짝짜꿍’과 ‘졸업식 노래’를 작곡한 인물이다. “엄마 앞에서 짝짜꿍/ 아빠 앞에서 짝짜꿍” 하는 ‘짝짜꿍’의 원래 제목은 ‘우리 애기 행진곡’이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로 시작하는 ‘졸업식 노래’도 누구나 부르던 노래다. 정순철은 ‘반달’의 윤극영, ‘봉선화’의 홍난파, ‘오빠 생각’의 박태준과 함께 한국 동요 4대 작곡가로 꼽힌다.
정순철의 노래는 지금도 불린다. 방정환은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로 높은 존경을 받고 있다. 하지만 정순철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없다. 더불어민주당 의원인 도종환 시인은 10여년 전 박사논문을 쓰기 위해 오장환 시인 관련 자료를 찾다가 정순철이라는 이름을 처음 봤다고 한다. “이분의 노래를 그렇게 자주, 그렇게 많이 불렀으면서도 작곡가의 이름을 가르쳐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한 사람의 이름이 역사에서 지워질 수 있는가 하는 사실도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도종환은 그때부터 정순철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6·25전쟁 당시 서울에 남아 있다가 납북된 후 그의 행적이 알려진 바 없고, 남한에서 그를 언급하기 어려웠다는 것도 알게 됐다.
도종환은 이 책을 통해 정순철을 우리 앞으로 불러낸다. 정순철의 발굴은 한국 동요의 선구자 중 한 명이었으나 철저히 잊혀진, 한 불운한 예술가를 복권한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정순철의 활동을 조명하면서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 초기 역사의 중요한 장면들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어린이 운동이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경계를 피하기 위해 선택된 민족운동의 성격을 가졌고, 어린이 운동의 일환으로 1920∼30년대 우리 음악사에서 이례적인 ‘동요 황금시대’가 펼쳐졌음을 알려준다.
우리나라의 초기 어린이 운동은 인권운동인 동시에 민족운동이었다는 특수성을 보인다. 색동회 멤버였던 진장섭은 수기에서 “그 당시 조국의 현실은 어른 상대로의 어떠한 운동도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었다”며 “그래서 우리는 일본인들의 날카로운 경계의 눈을 피하여 겉으로는 소년문제를 연구하는 평범한 단체인 양 보이게 해놓고, 실제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어린이들에게 민족의 자주독립 정신을 은밀해 배양해주자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밝혔다.
색동회는 동화와 동요를 통해 어린이 운동을 전개했다. 방정환은 동화를 썼고 정순철은 동요를 만들었다. 정순철은 함께 음악 공부를 하던 윤극영을 방정환에게 소개했다. 방정환은 윤극영에게 동요를 작곡해 달라고 부탁했다.
“참혹하게도 우리 아이들에겐 노래가 없어. 학교라는 데서는 일본말 일본 노래로 터무니없이 아이들을 몰아들이고, 사회라는 데서는 어른들이 부르는 방아타령 흥타령 등이 얼떨결에 아이들을 구슬리고… 윤! 동요곡 좀 하나 만들어봐 줘. 정서가 부친 우리 아이들에게 꽃다운 선물을 보내주지 않을 테야?”
일제시대의 동요는 노래 이상이었다. 정순철은 29년 동요작곡집 제1집 ‘갈닢피리’, 32년 두 번째 동요집 ‘참새의 노래’를 발표했다. 그가 작곡한 동요는 확인된 것만 40곡이 넘는다.
정순철의 가계와 생애를 깊숙이 추적하면서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의 사상적 뿌리를 드러낸 것은 이 책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이다. 도종환은 이 책을 쓰며 “대한민국 어린이 운동의 사상적 배경이 해월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정순철은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의 외손자였다. 그의 어머니 최윤이 해월의 딸이었다. 방정환은 동학 3대 교주 손병희의 셋째 사위였다. 방정환이 결혼 후 손병희의 서울 가회동 집으로 들어오면서 당시 그 집에 의탁하던 정순철과 같이 산 적도 있다. 그들은 동학의 자식이었고 천도교의 실천 운동으로 어린이 운동을 펼쳤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21년 결성된 천도교소년회는 22년 첫 어린이날 행사를 주도했고, 23년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색동회 멤버들은 ‘어린이’의 주요 필진이었다. 이들이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을 열었다.
23년 열린 두 번째 어린이날 행사에서는 ‘소년운동의 첫 선언’이 발표됐다. 어린이를 윤리적 압박과 경제적 압박에서 해방하고, 어린이가 배우고 놀기에 족할 시설을 제공하라고 요구한 이 선언은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권리 선언으로 유엔이 ‘어린이권리선언’을 채택한 것보다 한 해 앞선 일이었다.
식민지 조선, 장유유서가 지배하는 전근대 사회에서 어떻게 자생적인 아동권리 인식과 어린이 운동이 출현할 수 있었을까. 방정환과 정순철 같은 당시 20대 청년들은 어떻게 아이들을 우선으로 세상을 재편하자는 과감한 주장을 할 수 있었을까. 책은 그 배경에 동학이 있었다고 지목한다. 천도교가 초기 어린이 운동을 주도했고 그것은 “어린 자식 치지 말고 울리지 마옵소서”라고 한 해월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음악 교사로 살았던 정순철은 해방 후 윤석중 윤극영 등과 함께 노래동무회를 만들어 활동하다 전쟁 중 북한으로 갔다. 도종환은 “아이들을 위해 한 생애를 바친 그리운 그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었고, 한없이 위안을 주던 동요를 작고한 정순철이란 이름도 역사와 함께 지워져 갔다”고 썼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