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출마를 하던 20년 전의 마음을 돌이켜봤다. 제 소명이 욕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소명이 필요하다.”
더불어민주당 4선 의원을 지낸 최재성(56)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지난달 6일 밝힌 정계 은퇴의 변이다. 이번 대선 후 86세대(80년대 학번·60년대생) 정치인으로는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에 이은 두 번째 은퇴 선언이자 친문계 핵심 인사로는 처음이다.
지난 28일 서울 여의도 융집합연구원에서 그를 만났다. 정치인 생활을 마감하는 소회와 86세대 용퇴론에 대한 견해, 임기를 마치는 문 대통령에 대한 생각,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6·1 지방선거 전망 등을 들었다. 전화 인터뷰도 추가로 진행했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경기지사 출마설도 있었는데 은퇴를 발표했다.
“2016년 당이 어려울 때 당 사무총장으로 총선 불출마를 하면서부터 어느 시기에 어떻게 정치를 그만둬야 할지 생각해봤다. 정치를 하는 게 불가능해질 때까지 길게 하지 않겠다, 잘 정리하겠다는 얘기를 아내와 나눴다. 2004년 국회에 입성한 후 문명의 이동이라고 할 만큼 세상이 넓고 깊게 변했다. 제가 정치하면서 가졌던 생각과 이유가 일단락될 수밖에 없는 시대 변화였다.”
-정치를 시작할 때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소명이 있었다고 했다.
“정의로운 세상이 됐느냐고 하면 아직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정의와 불평등 해소를 말하더라도 시대가 바뀌면서 접근 방식과 언어, 문화가 달라졌다. 김영춘 선배가 은퇴하면서 ‘생활정치’를 말했는데 저희 세대가 가졌던 거대담론에 입각한 소명과 주장, 실천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 저는 민주화운동 속에서 굉장히 강하게 단련됐고, 노력해도 근본적으로 바뀌는 게 쉽지 않았다.”
-두 분의 은퇴가 86세대 퇴장의 신호탄이 될 것이라는 평가가 있었지만 이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86세대 용퇴론을 주장했던 송영길 전 대표가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가 됐다.
“그동안 정치권의 충원구조는 크게 보면 세대 대표성과 전문성 두 가지였다. 그러나 나로부터 시작하고 누구에게나 정보가 열려 있는 디지털 문명에는 맞지 않는다. 대표자와 전문가의 퇴조 시대다. 다음 세대의 대표성을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겠나. ‘포스트 586’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변화에 586이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는 개별적 판단의 영역이라고 본다. 정세균 이낙연 대표 세대가 고문으로 물러난 민주당에는 586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모두 나가야 한다는 것보다 책임질 사람은 책임지고, 역할을 할 사람은 남는 각자의 몫 아니겠나.”
-86세대가 기득권이 됐다는 비판은 어떻게 생각하나.
“586의 대표성이 확장돼 해석된 부분이 있다. 하지만 민주당 정치를 상당 부분 주도해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만한 책임이 수반되는 것이다. 586이 세대 대표성의 마지막이라는 것 자체가 굉장한 혜택이었기 때문에 용퇴론에 억울해할 이유는 없다.”
-정치의 중심에 있다가 거리를 두면서 시각이 달라진 부분도 있나.
“당연히 그렇다. 현역이었으면 5년 후 어떻게 다시 집권하고 윤석열정부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를 생각할 텐데 지금은 정말 나라가 걱정된다. 권력 운용이나 의사 결정이 어떻게 이뤄질지 그려지니까. 당도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 부분들이 보인다.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이나 지방선거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내용의 시비를 떠나 예민하고 철저한 관리가 필요한데 구멍이 많았다. 관점이 달라지니 괜히 혼자 걱정만 는다.”
-6·1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의 승리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이번 선거는 유례가 없는 특이한 상황이다.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기대 심리가 40%대로 현격하게 낮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취임 전 인수위 때 당선자의 모습이 국정 운영 스타일을 보여주는데 집무실 이전이 예고편이 됐으니 점수를 얻지 못했다. 반면 국민의힘 정당 지지율은 대선 때보다 훨씬 좋다. 새 정부가 그래도 잘 돼야 하지 않겠느냐는 마음이 국민의힘 정당 지지도로 갔다고 본다. 무엇보다 의제와 취임식 같은 몇 개의 시간표를 주도할 수 있는 쪽은 당선인과 그 정당이다. 새 정부 지원론이 조금 더 형성될 것이다. 민주당에 매우 어려운 선거라고 본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모두 전체 17개 광역 시·도 가운데 9곳을 얻어야 승리하는 것이고, 경기도가 승패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경기도는 어떻게 전망하나.
“역시 어렵다고 본다.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김동연 후보 지지율이 국민의힘 김은혜 후보에 앞서는 것으로 나오지만 김은혜 후보는 아직 정당 지지율과 새 정부에 대한 기대치가 모이지 않았다. 반면 김동연 후보는 추가 상승 여력이 잘 보이지 않는다. 검수완박도 새 정부 지원론에 기름을 부을 수 있는 사안이었다. 국민의힘이 중재안에 합의한 후 걷어찬 게 민주당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재명 민주당 상임고문이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지는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등판할까.
“대선에서 지고 나면 쉬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한데 이번에는 바로 지방선거가 있으니 이 후보에게 엄청난 고민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지금 출마하거나 선거를 직접 지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대통령 후보였던 사람이 선거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호명 당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좋다고 본다.”
-문 대통령의 퇴임이 며칠 남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대통령은 어떤 분이었나.
“당신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아주 정교하게 구축한 분이다. 책임 있는 판단을 하기 위한 정보 통로와 분석 과정을 잘 가동해 청와대 수석회의는 물론이고 개별 독대 보고, 개별 토론을 매일 하드하게 하셨다. 소명과 책임 의식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신 분이다. 국가 운영을 하게 되면 혁신적이기 어려운데 문 대통령의 결정은 거의 다 혁신적이었다. 충돌하는 쟁점이 있는 사안들은 항상 혁신적인 쪽을 택했다.”
-예를 들어 정책 결정의 경우 부동산을 비롯해 평가가 엇갈리는데, 어떤 부분을 혁신적이라고 보는가.
“정책이 성공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기존의 관성과 잘못된 문화를 바꾸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그런 결정들을 많이 했다는 의미다. 탄소 중립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2050년까지 탈탄소 사회로 전환하겠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목표여서 저도 불안할 정도였지만 대통령이 결단한 것이다. 탄소 중립은 결국 기술의 문제라는 게 문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투자와 노력을 통해 극복할 수 있으며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논리에까지 이르렀다. 아주 혁신적인 선택 아닌가.”
-임기가 끝나는 문재인정부가 어떻게 평가되기를 바라나.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인 정부. 군림하지 않은 겸허한 정부. 그리고 권력을 누리지 않은, 부패와 상관없는 정부. 검찰이 그렇게 기획수사를 해도 기소한 것은 정책과 인사였다. 부패로 기소된 건 한 건도 없다.”
-부패와 상관없다고 하지만 민주당의 검수완박 강행과 문 대통령의 법안 공포안 의결을 놓고 퇴임 후 안전 보장을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이다.
“소위 검수완박 법안이 통과가 돼도 문제이고, 민주당이 통과를 못 시키고 좌절해도 문제라고 생각했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국이었는데 국회 합의가 상황을 변화시켰다. 문 대통령은 여야가 합의한 만큼 거부권을 행사할 필요가 없었다. 퇴임 후를 걱정하거나 민주당에 대한 보복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프레임이다. 문제가 있으면 경찰이 됐든 공수처가 됐든 수사를 안 하는 게 아닌데 그렇게 느껴지도록 덮어씌우는 셈이다.”
-새 정부의 초대 정무수석에게 조언을 한다면.
“정무수석은 국회에 가고 정당을 상대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강기정 수석이 정무수석에 취임하면서 ‘정무는 정책에 민심을 입히는 것’이라고 했다. 동감한다. 날것 그대로의 정책이 아니라 민심을 입혀서 보고 분석하고 추진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책에 민감해야 한다. 달걀값부터 부동산, 재난지원금, 공매도, 무엇이든 다룰 수 있는 자리다.”
-정계 복귀의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건가.
“정치는 생물이라고 한다. 주로 말을 뒤집거나 은퇴를 번복하거나 피아가 바뀔 때 많이 쓴다. 저는 정치를 숨결이라고 생각한다. 숨결은 일상적으로 항상 느껴져야 하고 막히거나 멎으면 안 되는 것이다. 정치를 안 하겠다고 한 건 정치라는 숨결을 멈춘 것이고, 스스로의 정치는 이제 마감이 됐다는 뜻이다. 은퇴 후 사회에 기여하겠다며 소위 대접받는 일을 또 하는 경우도 있다. 저는 은퇴하면서 ‘세상을 이롭게 하는 작은 일이라도’ 찾겠다고 했다. 그게 무엇일지 계속 고민하고 있다.”
권혜숙 인터뷰전문기자 hskw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