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간의 관심이 온통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게 쏠려 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긍정과 부정의 양론이 각축을 벌이지만 그의 등장이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기수문화를 바꾸는 나비의 날갯짓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다. 40대 장관 발탁은 과거 검찰 관행대로라면 20명 넘는 선배 간부들이 줄줄이 옷을 벗어야 한다는 의미다. ‘줄사퇴’는 몇몇 후배에게 벼락출세의 기회가 되겠지만 퇴직 당사자에게는 날벼락이며 조직 전체로 보면 터무니없는 역량의 손실이다. 한 후보자의 표현대로 ‘20·30대 여야 대표를 배출한 진취적인 나라’에서 기수문화는 이제 시대착오적이고 이번 기회에 악습의 고리를 끊어야 하지만 그렇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새 정부도 기수 파괴나 연공주의 타파를 새로운 시대적 흐름으로 만들 생각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새 정부가 국무총리와 대통령 비서실장, 경제부총리와 경제수석까지 경제 관료 중심으로 기수에 따라 줄을 세우듯 원팀을 짠 것은 기수문화를 통한 협력의 이점을 살려 보겠다는 취지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관료 사회에서 기수 또는 연공은 인사에서 결정적 변수로 작용한다. 5급 행정고시의 기수는 현직이든 아니든 서열을 가늠하는 기준이자 각종 협력 네트워크의 코드가 되기도 한다. 관료 사회만이 아니라 공공이나 민간을 가리지 않고 규모가 크고 오래된 조직일수록 입사 기수 또는 연공은 임금과 인사, 인적 네트워크와 기업 문화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 인사관리에서 입사 기수는 누구나 쉽게 수긍하는 승진 기준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에선 기수와 연공에 기초한 조직 문화가 곳곳에서 도전받고 있다. 무엇보다 저성장과 고령화 시대 연공주의는 사치처럼 보이는 데다 MZ세대 진출과 디지털 기술 확산으로 곳곳에서 연공만 높은 고참의 위상이 꼰대로 격하되기도 한다. 검찰만 하더라도 사법시험이 폐지된 후 기수문화는 과거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행정부 인사에서도 연공서열을 타파하기 위한 이런저런 노력이 계속돼 왔다. 노무현정부는 3급 이상 고위직을 고위공무원단이라는 인재풀에서 직급과 직렬에 상관없이 발탁하도록 인사의 유연성을 확대해놓았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따르면 새 정부는 호봉이 아니라 성과 마일리지에 따라 승진이 가능하도록 공무원 인사제도를 점진적으로 바꿀 방침이라고 한다.
민간 대기업들은 이보다 한발 앞서 있다. 30·40대 임원 발탁은 새 트렌드가 됐고 직급체계도 대리부터 부사장까지 6~8단계를 2·3단계로 압축하기도 한다. 판교의 테크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삼성과 현대를 비롯한 전통 대기업들도 직무와 성과 중심의 임금체계 도입을 위해 특별팀을 만들고 위계적인 호칭 문화 타파를 위해 영어 이름을 쓰거나 직급을 생략한 호칭을 쓰기도 한다. 최근 기업에서 유행하는 수시채용으로의 인사 전략 변화도 변수다. 공채가 없어지면 입사 동기도 없어지고 기수에 따른 승진과 호봉 책정도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직업 세계의 일각에서 연공서열의 제도와 관행, 의식이 허물어지기 시작했지만 한국 노동시장이 연공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직 거대한 장벽 한두 개를 넘어야 한다. 첫째는 노동조합의 저항이다. 이철승 서강대 교수는 국제 비교 분석을 통해 한국의 연공주의는 오랜 경험을 필요로 하는 벼농사의 까다로운 생산방식에 기인한다고 설명하지만 이것을 산업 현장의 보편적 질서로 만든 힘은 노동운동이다. 1987년 이후 호봉제와 자동승급은 노조의 투쟁 목표였고 지금도 학교 비정규직 노조는 호봉제를 위해 파업을 불사한다. 더구나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임금체계를 개편하겠다며 노조를 압박해 왔기 때문에 탈(脫)연공에 대한 노조의 반감은 뿌리가 깊다.
더 큰 장벽은 연공주의를 대체할 직무주의 또는 프로페셔널리즘이 아직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회사에서의 직위 상승이 사회적 성취로 인정되던 시대를 살아온 40·50대에게 갑작스러운 연공주의 해체는 사회적 지위 하락 또는 상대적 박탈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지금은 어깨들도 신참한테 역(逆)멘토링을 받고, 관록이 아니라 기술에 능한 지능형 조직원이 수입을 올리는 시대다. 윤석열정부도 노동시장 개혁에 성공하려면 직무급 도입이라는 단답형이 아니라 연공주의 해체라는 큰 그물을 준비해야 한다.
최영기(한림대 객원교수·전 한국노동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