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두 얼굴의 아줌마다. 나랑 얘기할 적에는 쌍시옷이 들어가는 거친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쓰다가도 전화만 오면 목소리를 가다듬고 “네에, 엽쎄여엉. 예예! 말씀하쎄요옹!” 하며 드라마에 나오는 평창동 사모님 흉내를 낸다. 그 모습이 너무나 우스워 성대모사를 하며 엄마를 놀렸더니만, 이런 맙소사. 나도 모르는 사이 엄마를 쏙 빼닮은 두 얼굴의 아가씨가 돼 버렸다.
엄마는 오랜 연륜 덕에 그럭저럭 교양인 행세를 하지만 나는 아직 애송이인 탓에 정체가 곧잘 탄로 나곤 한다. 교양 있는 목소리로 그렇지 못한 단어를 툭툭 내뱉는 것이다.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했으면 좋았을 것을 “뻥치고 싶지 않아요” 하고 말한다든지. “창피해서 정말 혼났어요”라고 말했으면 있어 보일 것을 “쪽팔려 죽는 줄 알았어요” 하고 말한다거나. “제 표정이 좀 안 좋았나요?”라고 말했으면 괜찮았을 것을 “제 표정이 아주 그냥 썩었죠?” 하고 말하는 식이다. 경솔한 단어 선택을 후회하며 그 얼마나 많은 밤을 괴로워했던가. 뼈아픈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되도록 말을 아끼는 요즘이다.
바깥에서 말수를 줄이다 보니 남자친구 앞에서는 오히려 수다쟁이가 된다.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하다 보면 억센 단어도 자연히 흘러나오는 법. 그런데 얄미운 남자친구는 그럴 때마다 한 번을 그냥 넘어가는 법 없이 콕 집어 지적을 한다. 그렇다고 내가 불량배처럼 무시무시한 단어를 쓰는 것도 아니다. “초 치지 말라”는 일반적인 관용구만 사용해도 귀가 따갑도록 잔소리를 듣는다. 그런 거센소리를 들으면 마음에 상처가 남으니 부드러운 표현을 써 줬으면 좋겠단다.
보시다시피 이이는 언어에 무척이나 까탈스러운 사람이다. 가끔은 도가 지나쳐 어이가 없을 때도 있다. 어느 날은 “회사에서 완전히 묵리토도 됐다”고 말하기에 ‘묵리토도’가 무슨 말이냐 물었더니 ‘도토리묵’을 거꾸로 말한 거라는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무엇 하러 그렇게 말하냐 다시 물었더니 ‘묵사발’이라는 단어가 잔인해 ‘도토리묵’으로 순화했는데, 그마저도 끔찍해 ‘묵리토도’라고 돌려 말하는 거라나 뭐라나. 이럴 때면 남자 친구를 사귀는 게 아니라 시인을 모시는 문하생이 된 기분이 든다.
어찌 됐든 그의 부탁대로 부드러운 단어를 쓰려 나름대로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치도 못했던 부분에서 자꾸만 지적을 당하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다. 하지만 나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그에게 무턱대고 짜증을 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아무것도 아닌 말에 툭하면 상처받는 그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그의 심정을 헤아려 보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러던 중에 중학교 시절의 내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겨울이면 교복으로 터틀넥 니트를 입었다. 친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수업을 듣는데 나는 가스 불 위에 놓인 마른오징어처럼 꿈틀거리기에 바빴다. 쐐기풀로 짠 니트를 입기라도 한 듯 온몸이 뜨끔거렸기 때문이다. 엄마는 하루가 멀다 하고 보드라운 니트를 사다 날랐지만 나의 꿈틀거림은 나아질 줄 몰랐다. 이런 내가 유난스럽다며 지청구를 쏟아 놓는 엄마를 향해 나는 외쳤다. 엄살을 부리는 게 아니라 뭘 입어도 정말로 따가운 걸 나더러 어쩌라고!
그래, 내가 촉감에 민감하듯 그는 청각에 민감하구나. 남들이 듣기에는 아무렇지 않은 말이 귓가에 따끔하게 박히는구나. 엄살을 부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마음에 상처가 남아 그런 말을 쓰지 말아 달라고 애걸복걸했던 거구나. 이런 나의 생각이 맞는지 그에게 물었더니 그걸 이제야 알았냐며 눈을 흘긴다. 나는 그 정도인 줄 미처 몰랐다며, 앞으로는 더욱 신경 쓰겠다며, 진심 어린 사과를 전했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조심히 물었다. 깨달은 바가 있어 이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냐고. 당신을 소재 삼는 걸 마뜩잖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사람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다고. 싫다고 하면 당연히 쓰지 않겠으나 그럼 나는 다른 소재를 찾느라 힘든 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부탁한다고. 나의 구세주가 돼 달라고. 그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휴, 성공이다. 내가 하는 일에 초 치지 말라는 소리를 길게도 했더니 진이 다 빠진다. 수고스럽지만 별수 있나. 사랑하는 이에게 묵리토도 되지 않으려면 고운 말 이쁜 말을 쓰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