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4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작전 개시를 선언하자 긴급구호 전문 국제 NGO ‘피스윈즈’ 본부는 긴급 온라인 회의를 소집했다. 전 세계 33개 국가·지역에서 국제개발협력 사업을 수행하는 피스윈즈는 한국과 일본, 스리랑카 등의 다국적 구호팀을 구성해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댄 폴란드로 급파했다.
폴란드에 도착한 피스윈즈는 상대적으로 ‘취약 지역’인 몰도바를 주목했다. 서유럽 국가들과의 접근성이 좋은 폴란드에는 이미 유엔 기구를 비롯한 글로벌 구호단체들이 다수 활동에 들어간 반면 구소련 독립국이자 유럽 내 최빈국으로 꼽히는 몰도바에는 구호 단체 진입이 드물었다. 피스윈즈 다국적 구호팀이 현지 조사를 벌이던 때에 마침 몰도바에도 우크라이나 난민이 밀려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피스윈즈는 폴란드에서 구호팀을 철수해 몰도바에 집중하기로 했다.
‘필요한 곳에 도움을 준다’는 이념으로 설립된 피스윈즈는 지난 3월 7일(현지시간)부터 몰도바에서 우크라이나 난민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우선 몰도바의 수도 키시나우시(市)와 공동으로 우크라이나 난민을 위한 물자배급소와 진료소를 설치했다. 국민일보는 최근 고두환 피스윈즈코리아 상임이사와 서울에서 만나 현지 상황과 구호 활동 등에 대해 들었다.
목숨 건 물자보급 작전
2020년 설립된 피스윈즈코리아는 몰도바에서 본부 사업과 별도로 우크라이나에 물자를 보내는 보급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몰도바와 가까운 우크라이나 남부의 오데사 미콜라이우 지역을 중심으로 정신병원이나 요양병원 등 취약 시설에 생필품과 같은 구호 물품을 보내는 활동이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해당 시설들은 필수 물자들도 제대로 보급받지 못하고 있다.
구호 대원들은 국내 여권법상 여행금지 지역으로 설정된 우크라이나에 직접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몰도바에서 우연히 만난 토포렛 블라드미르 목사가 ‘나의 소명’이라며 우크라이나 물자 수송 지원을 자처하면서 보급 작전의 물꼬가 트였다. 몰도바 국적의 블라드미르 목사는 몰도바와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개척교회를 운영하며 사역 활동을 하던 인물로 우크라이나 지리나 내부 사정에도 해박해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피스윈즈코리아가 몰도바의 대형 물류 센터에서 필요한 물자들을 구입하면, 블라드미르 목사가 현지 스태프 1명과 함께 주 2회 정도 직접 승합차를 운전해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 전달하는 식이다. 언제 위험한 상황을 마주할지 몰라 새벽에 출발, 온종일 물자를 배송하고 밤 12시를 넘겨 새벽에 다시 돌아오는 ‘무박 2일’ 일정이었다.
물자 보급 차량 옆으로 미사일이 지나가는 일이 있을 정도로 현지 상황은 급박하다. 러시아는 개전 초부터 우크라이나 남부의 전략적 요충지인 오데사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엔 러시아군이 오데사 공항을 폭격하기도 했다. 블라드미르 목사는 구호 대원들에게 “여러 분의 지원과 기도로 우크라이나가 아직도 버티고 있다. 그 기도에 하나님도 응답하실 것으로 믿는다”며 “앞으로도 세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함께 국경 넘어온 반려동물들
현지 구호 대원들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난민 지원 과정에서 이색적인 장면은 반려동물에 대한 지원 부분이다. 민간인을 상대로 한 학살이 벌어진 부차를 위로 방문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주민들이 반려동물 케어를 요청할 정도로 우크라이나인들의 반려동물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고 한다. 현장에서 촬영된 영상을 보면 부차의 한 주민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집 없는 동물들을 보살펴 달라. 많은 사람이 보살피고 있지만 먹일 것이 없다”고 요구했고,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리가 하겠다”고 답했다.
전쟁을 피해 국경을 넘은 우크라이나 난민들도 반려동물들을 함께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키우던 고양이 11마리와 함께 피란 온 난민이 있을 정도다. 몰도바에 차려진 난민 캠프에는 난민들과 반려동물이 한데 뒤섞인 모습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몰도바 난민 캠프에서도 ‘반려동물 관련 지원을 해 달라’는 요청이 잇따르자, 피스윈즈코리아도 반려동물 지원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우크라이나 가족들과 함께 사선을 넘은 반려동물에게 필요한 사료와 용품들을 공급하는 일이다.
현지에서 해당 사업을 기획한 고 상임이사는 “갑자기 쫓기다시피 전쟁터를 탈출한 우크라이나인들이 둘에 한 집꼴로 반려동물을 데리고 온 것을 보고 놀랐다”며 “이들의 정서적 안정과 일상회복을 위해서는 반려동물을 위한 지원도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현지 의료진도 “난민들이 함께 데려온 반려동물을 케어해준다면 난민들의 정서적 안정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을 전했다고 한다.
“민간 협력 지렛대…국익 도움”
지난달 15일 몰도바에서 일시 귀국한 고 상임이사는 “유엔난민기구 등 대형 국제단체들의 역할도 물론 중요하지만, 실제 사업 착수에 이르기까지 사전 조사와 예산 집행 과정이 복잡하고 오래 걸린다는 단점도 있다”며 “보다 민첩하고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는 다양한 단체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몰도바에 있는 우크라이나 난민들에게는 우리가 최전선이자 최후방이다. ‘우리가 빠지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활동에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피스윈즈코리아는 전쟁 기간 난민 지원에 그치지 않고 전쟁 종료 후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까지도 구상하고 있다. 몰도바 현지의 와이너리를 인수해 난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난민들이 생산에 참여한 와인을 공정무역 방식으로 국내에 유통시키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그는 “민간 차원의 국제개발과 구호 활동은 국제협력 차원에서 국익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몰도바에서의 구호 활동은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지역에서의 민간 외교와 협력의 지렛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조만간 다시 몰도바 구호 현장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피스윈즈=1996년 일본에서 설립된 긴급구호 전문 국제 NGO다. 현재 전 세계 33개 국가·지역에서 국제개발협력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1996년 이라크 전쟁 쿠르드자치구 의료지원, 2011년 동일본대지진 후쿠시마현 구조 활동, 2018년 인도네시아 지진 구조 활동 등을 펼쳤다. 한국에서도 2018년 경주·포항 지진 조사, 2019년 강원도 산불 피해 복구, 2020년 대구·경북 코로나19 집단감염 현장 긴급구호 활동 등을 했다.
김판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