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새벽 2시의 해방일지

입력 2022-05-04 04:05

2017년에 집행된 세탁기 광고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외국으로 출장 간 아내가 공항에 도착해 남편에게 전화를 한다. 아이를 돌보며 집안일을 하게 된 남편, 별일 없냐는 아내의 질문에 자신감 충만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빨래가 아주 산더미인데 이 정도쯤 문제없다고. 아내가 묻는다. “뭐 한두 개 빠트린 거 아니고?” 그제야 빠트렸던 양말 한 짝을 찾아 세탁기에 넣으며 안 빠트리고 다했다고 능청을 부리는 남편. 아내의 칭찬이 이어진다. “오구오구, 잘했쪄요.”

광고 의도는 분명했다. 신세대 맞벌이 부부 스토리텔링을 통해 새로 출시한 세탁기의 여러 기능을 자연스럽게 소개하려는 것. 해당 기업은 보도자료를 통해 소비자들이 ‘집안일에 서툴 수 있는 남편도 걱정 없이 빨래를 할 수 있을 듯’이라는 반응을 보이며 제품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고 홍보했다. 당시 이 광고를 보며 좀 쓴웃음이 났다. 해외 출장지에서조차 아내는 빨래를 챙겨야 한단 말인가? 맞벌이 부부인데도 남편이 세탁기를 돌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일상적인 일이 아니라 ‘오구오구’ 칭찬을 해줘야 할 장한 일이라는 것인가? 15년 전도 아니고 불과 5년 전, 글로벌 일류기업이 생각해낸 신세대 부부의 모습은 딱 이 정도였다.

지난 4월, 영국에서 집행한 우리 기업 광고 하나가 큰 논란이 됐다. 결국 기업이 사과를 하고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광고를 삭제했다. 광고 영상은 한 여성이 새벽 2시에 스마트폰 워치를 차고 이어폰을 낀 채 어두운 도시를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에게 맞지 않는’ 다른 사람들의 방식을 거부하고 ‘나는 다른 일정으로 달린다’는 카피가 사용됐다. 이 제품 광고 페이지에는 ‘당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 당신의 방식을 선택하라’는 영문 카피가 게시돼 있다. 자신의 일정과 스타일에 맞춰 개성 있는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기업은 뜻밖에도 여성단체와 언론으로부터 비현실적이고 무신경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우 석 달 전 아일랜드에서 혼자 산책길을 조깅하던 여성이 살해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SNS에서 #그녀는달리고있었다(#shewasonarun)라는 해시태그 운동이 전개되며 여성들의 안전 문제가 큰 이슈가 됐다는데, 맙소사! 하필 새벽 2시에 혼자 어두운 골목과 거리를 달리는 여성이라니!

새벽 2시에 여성이 혼자 조깅하는 것이 가능하냐 아니냐를 따지려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비교적 치안이 안전한 우리나라에서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의 어떤 여성도 인적 드문 한밤중에 조금도 주저하거나 주변을 살피는 기색 없이(이어폰으로 두 귀를 막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마음껏(심지어 거리에서 만나는 낯선 남자와 인사를 나누며!) 달리며 개성과 자유를 구가할 수는 없다. 불행하게도 글로벌 기업의 사회적 감각은 지금도 딱 이 정도에 머물러 있다.

최근 큰 호응을 얻고 있는 주말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흥미진진하게 보다가 엉뚱하게도 이 광고가 떠올랐다. “무슨 일 있었는지 안 물어. 어디서 어떻게 상처받고 왜 이 동네로 와서 술만 마시는지 안 물어. 술 마시지 말란 말도 안 해. 그리고 안 잡아. 내가 다 차면 끝.” 주인공 염미정이 낮에는 말없이 일하고 밤에는 매일 소주를 네 병이나 들이켜는 외지인 구씨에게 이렇게 말할 때, 나는 몹시 궁금해졌다. 작가는 이 남자의 정체를 과연 무엇으로 작정해두었을까? 성만 알았지 이름조차 모르는 정체불명의 술꾼 남자와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이 돈을 떼먹고 떠난 옛 애인과 사람들과의 관계에 지친 생을 해방시켜줄 확률보다 새벽 2시의 조깅이 될 확률이 훨씬 더 높을 텐데. 이런 염려를 하는 건 드라마적 상상력을 무시한 빈곤함 탓일 테지만, 지금 여기는 아직 새벽 2시. 우리는 언제 이 어두운 거리에서 무사히 해방될 수 있을까?

최현주 (카피라이터·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