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동안 수입사에서 받을 공문을 지난해 말부터 최근까지 다 받은 것 같아요. 밀가루, 설탕, 유제품…. 오르지 않은 게 없어요. 계속 가격 인상을 알려야 하니 거래처에 공문을 보낼 때마다 ‘죄송하다’고 말하는 것도 일입니다. 내가 가격을 올린 게 아닌데도 미안하고 그렇네요.”
10년 넘게 식자재 유통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김모(43)씨는 요즘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했다. 제과제빵 재료 등을 수입해 유통하는데 지난해 말부터 수입품 가격 인상이 잇따르면서 인플레이션을 뼈저리게 겪는 중이다. 김씨는 “상황이 당장 나아질 것 같지 않은 게 걱정”이라고 했다.
물가가 심상찮다. 김씨와 같은 소상공인이나 소비자들은 일상 곳곳에서 ‘물가 급등’을 실감하고 있다. 특히 농산물 가격 상승이 전체 물가를 밀어 올리는 ‘애그플레이션’(곡물 가격 상승의 영향으로 일반 물가가 오르는 현상)은 심각한 수준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이 동반하는 현상)에 진입했다는 우울한 진단마저 제기된다. 농산물, 식료품을 포함해 전방위에서 물가가 오르는 데다 경기 부진, 고환율이 더해지면서 ‘물가 비상’을 알리는 경보음이 거세다.
한국의 물가 상승을 유발하는 핵심 요인은 해외에서 찾아야 한다. 식량 자립도가 낮아 국제 곡물가격의 바람을 많이 타기 때문이다. 브라질 우크라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먼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 ‘우리집 식탁’에 치명타를 안긴다.
밥상 물가에 영향을 주고 있는 애그플레이션은 2020년 하반기부터 조짐을 보였다. 이상기후 탓에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남아메리카 국가의 작황이 부진해지면서다. 소맥, 콩, 옥수수의 가격은 계속 상승세를 타왔다. 여기에 코로나19 팬데믹에 따른 수확 인력 부족, 물동량 처리 노동력 부족이 겹치면서 물류망 마비 사태를 불러왔다. 공급망에 생긴 구멍은 비용 상승, 가격 상승을 부추긴다.
최근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불’에 ‘기름’을 끼얹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사태 악화에 따라 밀, 옥수수, 보리를 중심으로 국제 곡물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밀, 옥수수, 콩의 지난 3월 시카고선물거래소(CBOT) 선물 가격은 평년 3월 대비 각각 137.7%, 102.1%, 72.0%나 치솟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세계인의 식탁을 위협하는 중이다. 세계 옥수수 수출량의 14%, 밀의 9%, 해바라기유의 43%를 차지하는 우크라이나의 농경지는 러시아군 폭격으로 상당수 훼손됐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기존 재배 면적의 28%에서만 수확 가능하다고 추산한다. 곡물 공급난이 하반기에도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러시아가 자국의 물가 안정을 위해 다음 달 30일까지 유라시아경제연합국에 밀, 보리, 옥수수 등 주요 곡물의 수출을 금지한 것도 악재다. 러시아는 연간 3770만t의 밀을 내다파는 세계 최대 밀 수출국이다.
세계적 식용유 대란도 ‘전쟁’을 도화선으로 한다. 우크라이나의 해바라기유 원료 생산이 급감한 상황에서 인도네시아는 지난달 28일부터 팜유와 팜유 원료물질의 수출을 막았다. 해바라기유 공급난으로 팜유 수요가 폭증하면서 인도네시아 내수시장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는 팜유 생산 1위국이다. 이 여파는 한국에서 라면, 과자, 치킨 등의 식료품은 물론 화장품에까지 밀어닥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촉발한 곡물가격 인상은 바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제 곡물가격의 변동은 3~8개월 시차를 두고 식품가격에 적용된다. 한국의 경우 6개월 정도 시차가 있다. 이에 식품업계도 당장은 여력이 있다고 한다. 3~6개월 분량의 원재료를 비축하고 있어서다. 다만 장기화는 다른 문제다. 식품업계 한 관계자는 “장기화한다면 연쇄적인 제품 가격 인상 압박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식품업계 또 다른 관계자는 수익성 악화를 우려했다. 그는 “지난해 많은 식품기업이 제품값을 올려서 다시 소비자가격을 인상하기에는 부담이 크다. 비용 절감에 힘쓰겠지만, 매출이 늘어도 수익성이 악화할 수 있다”고 전했다.
소비자들이 피부로 느끼는 물가 압력은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가공식품과 외식 메뉴 가격 인상이 잇따랐다. 라면, 빵, 가정간편식(HMR), 과자, 아이스크림, 치킨, 소주 등의 가격이 줄줄이 올랐다. 최근에는 외식 물가가 오름세를 주도한다. 주부 염모(39)씨는 “1만원으로 냉면 한 그릇을 못 사먹고 떡볶이 2인분도 어림없다. 지난해에는 일주일에 15만원어치 장을 봤다면 올해는 20만원이 들더라. 물가가 잡힐 것 같지 않아 돈을 쓰기 겁이 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물가 상승→소비심리 위축→경기 침체’의 악순환 고리를 우려한다. 스태그플레이션이 깊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은 원자재의 해외 의존도가 높은 만큼 다른 나라보다 물가 상승 압력이 크다. 확률적으로 봤을 때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다”고 진단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전방위적으로 물가가 오르고 있기 때문에 유동성 회수 등의 작업이 필요해졌다. 기준금리 인상, 기업 비용 부담을 덜어주는 방안, 유류세 인하 등의 구체적인 정부 조치가 요구된다”고 말했다.
문수정 정신영 기자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