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 질환도 발병 초기 집중 치료 땐 정상화 가능
K자 회복 아닌 ‘V자 회복’ 되도록 국가가 나서야
공공 이송체계 확립·정신건강심판원 도입 바람직
“고교 3학년일 때 조현병을 앓던 형이 가족 만류에도 불구하고 임의로 치료를 중단했다가 재발했고 그로 인한 정신과적 응급상황에서 일면식도 없던 두 명을 해치는 살인 미수를 저지른 적 있습니다.”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김영희 정책위원장이 최근 대한신경정신의학회와 한국의학바이오기자협회 공동 주관으로 개최된 새정부 정신건강 정책 제안 포럼에 참석해 어렵사리 털어놓은 가슴 아픈 사연이다. 김 위원장은 최근 협회에 접수된 다른 환자 가족 이야기도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경남 진주에 사는 80대 부부는 조현병 자녀가 임의로 치료 약물을 끊은 후 망상·환각 등의 증상이 나타나 부모인 자신들과 이웃에게 자해나 타해 위험 언행을 하는데도, 경찰과 정신건강복지센터가 아무 도움을 주지 않고 있다고 전화로 고통을 호소했다고 한다.
이에 협회장이 지역 경찰과 정신건강복지센터에 직접 접촉해 도움을 거듭 요청했지만 모두 거부당했다. 결국 불과 하루 만에 그 자녀가 실제 이웃집 기물을 부수는 등 위협 행동을 했고 그제서야 경찰이 응급입원을 시켰다. 자칫 ‘제2의 진주 안인득 사건’이 일어날뻔 했던 셈이다. 조현병 환자인 안인득은 2019년 4월 자신의 아파트에 불을 지르고 대피하던 주민들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10여명이 숨지거나 다쳤다. 사건 발생 전 안인득에 대한 이웃의 신고가 7번이나 있었지만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현장 출동 경찰이나 소방에 정신과 전문의가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정신질환자 상태에 대한 평가를 365일 24시간 실시간으로 진행해 비자의로라도 이송해야할 상황인지 판단을 제공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는 정신과적 응급상황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해도 자신들 눈앞에서 명백한 자·타해 행위를 하지 않는 한 인권침해 민원 등을 우려해 정신의료기관 입원치료 실행을 꺼리는 실정이다.
김 위원장은 “경찰은 ‘가족인 당신들이 알아서 사설 구급차를 부르든가 해서 정신병원에 데려가 보호입원(보호 의무자에 의한 입원)을 시키든지 하라. 혹 나중에 환자가 명백한 자·타해 행위를 하거든 그때 다시 우리를 불러라’고 하는 게 현실”이라고 전했다.
실제 신경정신의학회 법제사법특별위원장인 백종우 경희대 교수가 발표한 ‘정신응급에서 급성기, 지속 치료까지 인프라 확보 방안’ 내용을 보면 2018~2019년 5개 국립정신병원에서 비자의 입원 심사가 이뤄진 3만6096건의 약 76%는 가족(59.1%)과 사설 이송단(16.8%)에 의한 것이었다. 경찰과 구급대원에 의한 ‘공공 이송’은 16.2%에 불과해 대부분의 입원은 여전히 가족 책임이었음을 보여준다.
정신질환자 돌봄의 최후 보루인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는 급성기 증상이 발생(혹은 재발)해도 환자 본인의 동의가 없으면 서비스를 시작할 수 없다. 현행 법제도상 권한이 매우 제한적이어서 가족 등 보호 의무자에게 입원 치료, 경찰·소방에게 ‘공공 이송’을 오직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 반면 미국 영국 호주 대만 등은 경찰과 소방에 공공 이송 책임과 권한을 주고 (준)사법기관 또는 지자체가 환자의 정신건강진단평가를 내리도록 하고 있다.
백 교수는 “중증 정신질환 등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당사자나 가족이 아닌, 국가책임하에 쉽게 치료·지원을 받는 환경이 하루빨리 구축돼야 한다”며 “현행 정신건강복지법 개정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뤄 개인·지자체장에게 맡겨진 비자의 입·퇴원 결정을 선진국처럼 ‘사법입원(법원이 결정)’ 또는 ‘정신건강심판원’ 도입으로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신건강 서비스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덴마크 등이 시행하는 24시간 정신건강 전문의 상담, 소방과 경찰 등 현장의 어려운 상황에 대한 대면·비대면 지원 시스템도 마련돼야 한다고 백 교수는 말했다.
신경정신의학회 이동우 정책연구소장은 ‘정신건강국가책임제 어떻게 할 것인가’ 발표에서 중증 정신질환자 앞의 두 갈래길을 언급하며 “응급 상황→급성기→지속 치료의 연속성 확보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중증 정신질환은 발병 초기 1~2개월 집중 및 지속 치료를 하면 다시 정상인의 길로 가지만 자신이 발병했는지 조차 모르는 ‘병식 부재’로 인해 초기 치료가 늦어지고 치료 중단, 재발의 악순환이 이어지면 결국 만성 중증화의 길을 걷게 된다”고 설명했다. 즉 응급→급성기→지속 치료 여부에 따라 ‘K자 회복’의 갈림길에 선다는 것이다(그래픽 참조). 이 소장은 “급성기 병상 확보와 치료 제한 철폐, 지속 치료 및 재활 인프라 강화를 통해 K자 회복의 기로에서 ‘V자 회복’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공공 이송 체계를 확립하고 광역별 정신응급센터 설립도 필요하다. 급성기 증상이 발생한 환자의 응급 입원을 위한 정신응급센터는 2018년 12월 고 임세원 교수 피살사건 후 마련된 일명 ‘임세원법’의 일환으로 국회를 통과했으나 올해 예산 심의과정에서 반토막이 났다.
백 교수는 “3년째 지속되는 코로나19로 국민의 정신건강에 빨간불이 켜진 상태다. 코로나 블루로 인해 기존 정신질환이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면서 “우울증 국민건강검진 후 발견된 고위험군의 지역 연계 치료와 롱 코비드(장기 후유증) 중 정신건강 지원책 마련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글·사진=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