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아이들은 자란다

입력 2022-05-02 04:02

올해 가정의 달인 5월의 시작은 다소 착잡하다. 러시아군에 저항 중인 우크라이나군이 참호로 삼고 있는 마리우폴 아조우스탈 제철소 내부 모습이 공개됐다. 공개된 영상에서 아이들은 비닐봉투를 테이프로 붙여 만든 기저귀를 차고 있다. 아이들은 말간 얼굴로 “집에 가고 싶어요” “햇빛을 보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작가 올가 그레벤니크는 연필로 그린 그림책 ‘전쟁일기’를 통해 우크라이나의 참상을 고발했다. 부모는 아이들의 팔에 생년월일과 이름, 연락처를 적는다. 사망 시 신속하게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아이들은 방공호가 된 지하실에서 체스 게임을 하고, 분필로 벽에 그림을 그리며 두려움을 견딘다.

팬데믹은 아이들에게 새로운 고통을 안겼다.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 친구와 손잡고 뛰어놀 수 없는 괴로움, 마음껏 숨 쉴 수 없는 답답함…. 놀이와 학습이 제한되자 아이들은 무기력감을 느꼈다. 지난해 캐나다 캘거리대 연구팀 조사에 따르면 팬데믹 이후 전 세계 청소년 4명 중 1명은 임상적으로 높아진 우울증 증세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집’(2019)이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인 열두 살 하나는 매일 다투는 부모님 때문에 속을 끓인다. 유미와 유진 자매는 집안 형편 때문에 자주 이사를 다니는 게 싫다. 어느 여름방학, 세 아이는 동네에서 우연히 만나 마음을 나누며 가까워진다. 가족에 대한 고민을 터놓으며 셋은 단짝이 된다. 이들은 각자의 ‘우리집’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아이들 이야기지만 어른 관객들이 공감한다. 각자 오래된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연출한 윤가은 감독은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줄곧 찍어왔다. 얼마 전 만난 윤 감독은 “어릴 때는 강렬한 감정을 느끼는 사건이 있어도 상황을 객관화하기 어렵다. 지식도 경험도 없는 어린이로서 돌파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하지 못한 말이 속에 남는다”며 “이제는 말할 수 있는 목소리가 생겼기에 ‘어른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못다 한 내 이야기를 한다’는 차원에서 접근한다”고 했다.

아이와 어른의 감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들은 더 오래 기억할 뿐이다. 그래서 아이의 몸과 마음은 최대한 보호받아야 한다. 최소한의 상처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힘을 가질 때까지. 아이는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지만 정확히 꿰뚫어 본다. 더 크고 깊게 느낀다.

어린아이를 품에 안아 본 사람은 안다. 위로는 어쩌면 어른이 아닌 아이가 가진 능력이라는 걸. KBS에서 ‘아기싱어’라는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다. 어린이날 100주년을 기념해 새 동요를 만드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가수와 작곡가로 구성된 음악 선생님들이 동요를 만들고, 어린이 출연자들이 부른다. 최근 방송분에선 누가 만든 노래가 가장 마음에 드는지 아이들이 투표를 했다. 표를 적게 받아 실망한 가수에게 한 아이가 다가가 안아주며 말했다. “내가 위로해 줄게요. 괜찮아요. 다음에 이기면 돼요.”

얼마 전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내내 건조한 날씨가 이어지다가 반가운 비가 왔다. ‘공기가 촉촉해지니 비염도 가라앉겠지, 이른 더위 가시면 일할 때 짜증 좀 덜 나겠지’ 생각하던 친구에게 아들이 말했다. “엄마, 이제는 강원도에 난 산불이 꺼지겠지?” 우리는 아이에게서 더 많이 배운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어린이는 신이 인간에 대해 절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땅에 보낸 사신”이라고 말했다. 병든 사회에서 아이가 건강한 어른으로 자라긴 쉽지 않다. 어릴 때 받은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그 상처는 계속 자란다. 사회가 불안정할수록 미래를 위한 어른들의 고민과 배려가 더 필요한 이유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날을 제정한 지 올해로 100년째를 맞이한다. 거리두기 해제와 함께 다양한 행사들이 열린다. 얼마나 성대하게 기념하느냐보다 우리 사회가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지켜줄 준비가 돼 있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임세정 문화체육부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