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왜 인문학인가?

입력 2022-05-02 04:05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이공계의 첨단기술 분야가 각광을 받고 있는 반면에 인문사회 분야는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전국 4년제 대학의 공학 계열 학과는 2012년 1333개였던 것이 2021년에는 1446개로 8.5%가량 늘어난 반면 같은 기간 인문계 학과는 962개에서 807개로 16%가량 줄었다.9년 동안 인문 계열 학과 155개가 사라진 것이다. 줄어든 학과는 이른바 ‘문사철(文史哲)’로 불리는 문학, 역사, 철학 관련 학과들이다. 이들 학과가 퇴출된 이유는 졸업생들의 취업률이 낮아서 학생들의 선호도가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소비자 중심의 교육’을 강조하는 교육계에서 소비자인 학생이 싫어하는 학과를 존속시킬 이유가 없다.

그런데 푸대접 받고 있는 이 문사철 학과가 인문학의 핵심을 이룬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거칠게 말하면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전통시대에는 인간답지 못한 인간을 금수(禽獸)에 비겼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사람으로 하여금 금수와 같은 짓을 하지 못하도록 해주는 역할을 했다. 즉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이 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인문학의 기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온갖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인 범죄 사건이 일어나는 이 시대에 인간이 금수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주기 위해서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절실히 인문학적 소양이 요구된다. 인문학적 소양은 문학 작품을 읽고 역사를 공부하고 철학적 사색을 함으로써 우리가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바탕이 된다. 그러므로 인문학적 소양은 인간이 금수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올바른 삶을 지향하는 모든 인간 활동의 기본 동력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비근한 예로 각종 재판에서의 판사의 활동을 살펴보자. 재판에서 판사의 판결은 절대적이어서 판사의 판결에 따라 피고인이나 피고의 운명이 결정된다. 그래서 판사는 판결을 내리기 위해 법조문을 꼼꼼히 살펴보고 이전의 판례들을 샅샅이 검토함으로써 최대한 판결의 공정성을 기하려고 노력한다. 판사는 응당 기존의 판례들을 참고하고 법조문에 따라 판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간단하지가 않다. 우선 해당 사건에 적용할 법조문이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아무리 법이 많다 하더라도 인간의 행동을 모두 규율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간의 행동 양태는 다양한 것이다. 이럴 때에는 비슷한 판례들이나 법조문의 도움을 받아서 판사의 재량에 따라 판결할 수밖에 없다.

또 해당 사건에 적용할 법조문이 있고 비슷한 판례가 있더라도, 사람이 저지른 일이라 사건마다 차이가 있어 역시 판사의 재량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 우리는 판사가 ‘정상을 참작하여’ 판결하는 경우를 흔히 보는데, 같은 형량에 처할 사건이라도 경우에 따라 정상을 참작하는 것 역시 판사의 재량에 달려 있다. 이러한 판사의 재량이 합리적이고 도덕적이어야 할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재량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판사의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 법률적 지식만 가지고는 안 된다.

이 글에서는 판사의 판결이라는 하나의 예를 들었지만, 인문학적 소양은 인간 생활의 폭넓은 공간에 두루 필요하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는 또 다른 측면에서 인문학적 소양이 요구된다. 바로 기계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일이다. 지금 인공지능(AI)은 가공할 만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이 AI는 여러 면에서 특히 산업·의료 분야에서 인간 생활을 무척 편리하게 해주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AI의 활용도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기계가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을 대신해주는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명주 서울여자대학교 교수의 말처럼 ‘AI는 양심이 없다’는데 양심이 없는 AI가 인간을 대신해서 판단하고 결정하는 사태를 계속 조장해야 하는가. AI 기술이 계속 발전한다면 인간이 기계의 노예가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기계로부터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도 우리는 인문 정신, 인문학적 소양으로 철저히 무장해야 할 것이다. “AI가 인류의 종말을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한 스티븐 호킹의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퇴계학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