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의 실점 없이 남은 이닝을 마무리 지어 경기를 ‘잘 져야’ 할 패전처리 투수가 갑자기 흥분하며 폭투와 사구(死球)를 뿌려댄다. 경기는 더 엉망이 됐다. 사실 이 투수는 선발로 나와 줄곧 던졌다. 경기 초반에는 큰 기대를 받았고 구위도 괜찮았지만 중반 이후 무너졌다. 열성팬들이 계속 응원을 해줘서인지 본인은 좋은 피칭을 했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경기를 졌는데도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가 다 끝나가는 시점에 많은 말을, 그것도 이닝을 끝내는 깔끔한 투구가 아니라 대량 실점으로 연결되는 사사구 같은 말들을 쏟아냈다. 몇 개만 짚어보자.
“국가의 백년대계를 토론 없이 밀어붙이면서 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하니 무척 모순적이라고 느껴진다.”(4월 29일 청와대 국민청원 답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추진하는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을 비판한 발언이다. ‘탈청와대’ 공약을 먼저 내놨던 문 대통령이 윤 당선인의 탈청와대를 헐뜯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국가의 백년대계로 규정한 것도 동의하기 어렵다. 이전 과정에 세금이 들어가는 것 빼고는 민생과 큰 상관이 없는 일이다. 집무실 이전보다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이야말로 사법 체계의 대변화를 가져와 국민의 삶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므로 국가의 백년대계라 할 수 있다. 이 백년대계를 더불어민주당이 어떤 토론도 설득도 없이 졸속으로 밀어붙였는데도 문 대통령은 제지하지 않았다. 법안 거부권도 행사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모든 면에서 보면 늘 저쪽(보수진영)이 더 문제인데, 저쪽 문제는 가볍게 넘어가고 이쪽의 작은 문제가 더 부각되는 이중 잣대도 문제라고 생각한다.”(4월 25일 JTBC 손석희 대담) 귀를 의심케 하는 발언이다. ‘이쪽’과 ‘저쪽’으로 편을 가르는 표현도, ‘쟤가 더 나빠요’라는 어린아이 투정 같은 하소연도 대통령의 언어로 매우 부적절하다. 이중 잣대로 이쪽이 피해를 봐 왔다고 인식하는 것 자체가 현 정권이 내내 지적받아온 ‘내로남불’이다. 대담에서 문 대통령은 시종일관 억울함을 호소했다. 현 정권을 향한 거의 모든 비판을 부당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못한 게 없는데 ‘저쪽의 부당한 공격’으로 그간의 치적이 부정되고 폄훼되는 바람에 정권을 넘겨주게 됐다는 인식이다. 반성과 자책이 있어야 할 자리에 억울한 심사만 가득하다.
“편하게 국민을 들먹이면 안 된다. 국민을 이야기하려면 정말 많은 고민이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정의를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독점할 수는 없다.”(JTBC 손석희 대담) 현 정권 사람들이 늘 해오던 게 고민 없이 편하게 국민을 들먹이면서 정의를 독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런 말을 들으면 헛웃음이 나온다.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는 “국민만 바라보며 중단 없이 나아가겠다”면서 검수완박 액셀을 밟았다. 민주당 지지층으로 한정된 국민만 바라보고, 나머지 국민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폭주를 거듭했다.
“아직도 이유를 밝혀내지 못한 일들이 남아 있다. 세월호의 진실을 성역 없이 밝히는 일은 아이들을 온전히 떠나보내는 일이다.”(4월 16일 세월호 참사 8주기 메시지) 집권 5년 동안 진실을 밝혀내지 못했으면 게을렀거나 무능한 것이다. 남 일 얘기하듯 ‘진실 규명’만 하염없이 외칠 게 아니라 자신의 태만과 무능함에 대해 사과해야 마땅하다.
아마 그동안 투수는 괜찮은데 타선의 득점 지원이 부족해서 경기가 어려워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확실해졌다. 투수가 제일 문제였다.
천지우 정치부 차장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