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에 돌려줄 돈 600억대 횡령… 우리은행 10년 동안 몰랐다

입력 2022-04-29 04:04

우리은행 차장급 직원이 6년 동안 614억원을 빼돌렸다가 적발됐다. 은행 측은 최초 범행 이후 10년 가까이 횡령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금 관리가 특히 중요한 시중은행의 내부통제 시스템에 구멍이 난 것이다.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우리은행에서 614억원을 횡령한 혐의를 받는 은행 본점 직원 A씨를 지난 27일 체포해 조사 중이라고 28일 밝혔다. 우리은행은 최근 내부 감사 과정에서 기업구조개선 업무를 담당하던 A씨의 범행을 포착하고 전날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당일까지 출근했던 A씨는 돌연 잠적했다가 밤 늦게 경찰에 자수했다.

경찰은 A씨가 2012~2018년 3차례에 걸쳐 뭉칫돈을 빼돌린 것으로 보고 있다. 마지막 인출 뒤 해당 계좌는 해지했다고 한다. 횡령금은 대우일렉트로닉스 인수를 위해 이란의 가전업체 엔텍합이 채권단에 지급한 계약금(578억원)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은행은 대우일렉트로닉스의 매각 주관사이자 주채권은행이었다.

문제는 이 자금을 엔텍합에 돌려줘야 한다는 점이다. 엔텍합의 대주주인 다야니 가문은 2015년 한국 정부를 상대로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해 2019년 최종 승소했다. 하지만 미국의 대(對)이란 금융제재로 돈을 돌려주지 못하다가 올 1월 미국의 송금 허가가 떨어졌다. 우리은행 측은 배상금을 갚기 위해 계좌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횡령 사실을 뒤늦게 파악했다.

경찰은 A씨가 횡령한 돈 상당부분을 주식투자 등에 쓴 것으로 보고, 구체적인 사용처를 확인하고 있다. 또 장기간 범행이 이뤄진 점 등에 비춰 공범이 존재할 가능성도 열어두고 조사 중이다. 금융감독원 역시 사안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우리은행에 대한 수시감사에 착수했다.

전문가들은 사건을 ‘이례적 일’로 평가했다. 그간 은행 횡령 사건은 주로 창구에서 마주하는 고객 예치금을 횡령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은행의 횡령유용 사건은 모두 16건으로, 피해액은 67억6000만원 정도였다.

횡령 규모가 600억원대 거액이지만 오히려 시중은행 구조가 횡령에 취약해 자체 감사에서 적발하지 못한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기업감사를 담당하는 한 회계사는 “415조원의 자산을 가진 우리은행 입장에서 600억원은 소액이라 내외부 감사에서 인지하지 못했을 수 있다”며 “은행은 연간 입출금 내역이 막대하기 때문에 하나씩 따져보는 건 불가능하고, 일정 금액 이상이나 특이한 금액 위주로 들여다보는데 현실적으로 꼼꼼하게 살펴보긴 어렵다”고 설명했다.

박민지 김판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