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정신에 자리 잡은 언어는 우리의 생각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친다. 4월은 추위가 물러가고 만물에 생명의 기운이 맴도는 때인 만큼, 시인들은 이 아름다운 달을 묘사하고 칭송하는 시어를 많이 만들어냈다. T S 엘리엇은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lest month)이라고 함으로써, 들뜬 봄기운 이면에 섬뜩할 정도로 진지한 기운을 불어넣었다.
‘가장 잔인한 달’이란 꼬리표 때문일까. 4월만은 여느 때처럼 정신을 놓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래서인지 4월이 며칠 남지 않을 이맘때면 왠지 모를 죄책감도 생긴다. T S 엘리엇은 제1차 세계대전 상황에서 4월을 잔인하다 했지만, 대한민국 현대사에서도 4월은 충분히 잔인한 달이다. 일본의 강압적 식민화에 항거하며 임시정부가 수립됐고, 해방 이후 좌우 대립이 제주 4·3사건에서 잔인한 폭력으로 표출됐다. 민주화에 대한 오랜 열망과 정부의 부정부패에 대한 반발로 4·19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8년 전에는 4·16 세월호 참사가 있었다. 고난주간 한가운데 일어난,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인지라 그해는 부활의 빛마저 유독 슬프게 느껴졌다.
이처럼 봄빛으로 충만한 4월은 매해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여러 일을 우리 앞에 내어놓는다. 그런데 4월의 잔인함보다 더 잔인하게 느껴지는 것은, 현대사의 비극적 사건 피해자를 포함해 타자의 고통을 대하는 태도가 오늘날 상당히 ‘정치화’돼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슬픔은 당파적 이익에 이용되고 애도의 권리는 박탈당하고 올바른 기억과 인정의 책임은 면제된다. 인간 삶에 정치와 무관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만은, 모든 일을 정치적으로 해석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래서도 안 된다. 독일의 법철학자 카를 슈미트의 말대로 정치가 적과 친구를 구별하며 이루어지다 보니, 정치 논리에 함몰되면 타인의 존엄과 가치마저 진영논리에 굴복시킬 정도로 사람이 잔인해질 수 있다.
우리 삶의 비극에도 아랑곳없이 세상을 일방적으로 환하고 명랑하게 만드는 4월은 잔인하다. 역사 속 4월의 잔인함에 대한 기억은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고, 각종 구분과 갈등의 논리로 얼어 있는 인간의 마음은 쉽게 녹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얼었던 땅에서 라일락이 피고, 봄비가 생기 없던 뿌리를 일깨우는 4월을 ‘잔인한 달’이라 불렀던 것과는 다르게 4월을 맞이한 시인도 있다. T S 엘리엇은 세계대전이라는 참사 한가운데서 생명과 죽음의 대비를 봤다면, 정연복 시인의 ‘4월’은 인류의 거짓과 폭력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찾아오는 봄의 생명력을 노래한다. 그 도입부가 인상적이다.
‘악의 없는 거짓말이/ 너그럽게 용납되고도 남는/ 만우절로 시작되는 4월은/ 통이 무척 큰 달이다.’
시인의 관찰에 따르면 사람들이 거짓말을 해도 세상이 유지되는 것은 4월마다 형형색색 꽃들이 땅을 덮으며 걷잡을 수 없이 피기 때문이다. 얼었던 땅에서 솟아나는 풀과 꽃의 기세에 ‘거짓과 기만의 세상’이 한풀 꺾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4월의 화려한 빛깔이 심정에서 불러내는 경이는 거짓보다는 진리, 죽음보다 생명에 희망을 걸도록 마음의 추도 조정해 준다.
해마다 4월은 우리의 정신 속에서 쉽사리 조화되지 않을 역사 앞에서의 심각함과 생명에 대한 경이를 함께 불러일으킬 것이다. 특히 올해는 우크라이나 전쟁, 일상회복의 기대, 정권 교체 등을 놓고 유독 혼란스럽기도 하다. 이럴 때일수록 생명을 경시하는 폭력과 기만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남은 며칠 동안이라도 4월이 통 크게 선물하는 색과 향기와 맛과 소리와 감촉을 몸속에 가득 채워 넣을 계획 하나쯤 짜보면 어떨까.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