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과 교감 ‘좋아요’… 진영대결은 ‘나빠요’

입력 2022-04-30 04:01

문재인정부 국민청원 게시판이 5년 만에 문을 닫는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인수위원회는 문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이후에도 한시적으로 운영하겠다고 했지만, 윤석열정부가 계획하는 통합플랫폼이 만들어지면 지금의 국민청원 게시판은 막을 내리게 된다.

국민청원 게시판은 문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아 탄생했다. 지난 5년 동안 총 5억1569만명이 방문했고, 누적 게시물은 110만8471건에 달한다. 하루 평균 31만명 넘게 방문했고, 매일 670여건의 청원글이 올라온 셈이다. 이 중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정부와 청와대가 직접 답변한 것은 284건이다.


국민청원 게시판은 청와대와 국민의 직접 소통을 늘리겠다는 취지에 걸맞게 일정 부분 성과도 있었지만 부작용도 적잖이 드러냈다. 실제로 제도권의 관심에서 밀려나 있던 이슈들이 국민청원을 통해 수면 위로 드러나곤 했다. ‘공분’ 여론이 형성돼 수사기관이 신속히 수사에 착수하고, 국회의 입법으로 이어지는 사례도 나왔다. 하지만 국민청원이 군중심리를 부추기고, 지나친 엄벌주의로 흘러 부작용이 크다는 비판도 동시에 제기됐다. 진영 갈등이 극심했던 문재인정부 중·후반기부터는 사실상 진영 대결의 장으로 전락했다는 지적도 있다.

제도권 관심 밖 이슈를 공론화하다

국민청원은 그간 소외됐던 담론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5년간 분야별 총동의 수’를 보면 인권·성평등·안전·환경·반려동물 등이 상위권에 있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 연구소 교수는 29일 “국민청원 게시판은 ‘제3의 공론장’으로서 역할을 했다”며 “기존 제도권에 들어오지 못했던 소수자들의 인권문제나 가려졌던 사건·사고가 국민청원을 통해 드러나게 됐다”고 평가했다.

국민청원 동의 수 1위에 오른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은 처음엔 크게 여론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N번방의 실체를 처음 밝혀낸 ‘불꽃추적단’은 실상을 경찰에 알렸다. 하지만 경찰의 본격적인 수사가 이뤄진 계기는 국민청원이었다. 국민일보의 연속보도와 맞물려 국민청원까지 더해져 여론이 폭발하자 경찰청장이 나서서 수사 확대를 지시했다. 이후 국회에서도 ‘N번방 방지법’ 등 관련 법안이 만들어졌다.

반려동물 인구가 증가하면서 함께 대두한 동물학대 문제도 국민청원 덕을 톡톡히 봤다. 최민경 동물권행동 카라 활동가는 “동물학대는 그동안 주요 의제로 다뤄지지 않았는데 국민청원을 통해 세상에 많이 알려지고 언론에도 다양하게 인용 보도됐다”며 “관계 부처에서도 해당 이슈를 검토하고, 시민들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되는 등 긍정적 효과가 많았다”고 말했다.

많은 국민이 입법부인 국회와 사법부 재판에 대한 불신, 여기에 사회 변화를 위해 직접 ‘참여하고 있다’는 효능감 때문에 청원에 참여한 것으로 파악됐다. 청원에 여러 차례 동참했다는 대학생 김모(25)씨는 “청원에 동의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청원으로 해결될 문제인가 의아할 때가 많았다”며 “기존 제도와 정치권이 피해받은 개인을 구제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직장인 오모(54)씨는 “내가 동의한 청원에 청와대가 답변하는 모습을 보니 신기했다”며 “그 후로 청원사이트에 종종 접속하게 됐다”고 말했다.

숙의 부족한 입법, 여론재판 부작용도

게티이미지뱅크

민청원이 순기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론에 휩쓸려 숙의를 충분히 거치지 않은 입법이 이뤄졌다는 지적도 있다. 민식이법이 대표적인 예다. 민식이법은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당시 일곱 살 김민식 군이 차에 치여 사망하는 사고가 계기가 됐다. 국민청원이 여론을 결집하는 역할을 했고, 이에 힘입어 운전자 처벌을 강화하는 민식이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하지만 도로에 아이들이 일부러 뛰어드는 등 악용 사례가 생기며 현재 민식이법을 개정해 달라는 국민청원에 35만명 이상이 동의한 상태다.

사회적 공분을 샀던 고(故) 윤창호씨 사건도 마찬가지다. 부산에서 군 휴가 중 횡단보도를 건너다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뇌사상태에 빠졌던 윤씨가 끝내 사망하자 부모와 가족은 국민청원 게시판에 억울함을 호소했다. 여론은 들끓었고, 정치권도 호응하면서 음주운전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을왕리 음주 벤츠 역주행 사고도 윤창호법의 적용을 받아 비교적 높은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윤창호법은 지난해 12월 위헌 결정이 났다.

수사기관과 사법 당국에서 사실관계를 가려내기 전에 국민청원 동의 수를 앞세워 여론재판을 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사실관계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분별한 여론몰이로 인한 부작용 또한 컸다.

평창올림픽 당시 왕따 논란으로 전 국민적 질타를 받았던 김보름 선수의 예가 국민청원의 어두운 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김 선수가 경기 도중 의도적으로 노선영 선수를 따돌렸다며 김 선수의 선수 자격을 박탈해 달라는 국민청원은 당시 60만명 넘는 동의를 받았다. 노 선수와의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한 김 선수는 최근 당시 괴로웠던 심정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전하기도 했다.

‘이수역 폭행사건’은 여성이 피해자라며 가해 남성을 엄벌해 달라는 국민청원을 올리면서 이슈가 됐다. 곧 젠더갈등으로 번졌지만 경찰 조사 결과 여성들이 먼저 남성의 신체를 건드린 것으로 확인됐다. ‘곰탕집 성추행 사건’ 또한 아내가 가해자 남편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30만명 가까이 동의 수를 얻었다. 진실 공방에, 남성들의 항의 시위까지 벌어졌지만 결국 법원은 남편의 성추행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조국 사태 이후, 진영 대결의 장으로 전락

문재인정부 중·후반기 국민청원 게시판이 진영 대결의 장으로 전락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2019년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를 기점으로 각 진영의 세(勢)를 과시하는 글들이 다수 올라오기 시작했다.

조 전 장관의 법무부 장관 임명을 놓고 세간이 떠들썩하던 때 국민청원 게시판도 찬반으로 극명히 나뉘었다. 각 진영의 지지자들은 국민청원 게시판에 몰려 동의 수를 높이는데 화력을 쏟아부었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추·윤 갈등’ 국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문재인 대통령 탄핵 촉구와 응원글이 함께 올라오며 동의 수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자유한국당(국민의힘) 해체와 더불어민주당 해산 청원글이 올라오며 진영 간 기싸움도 팽팽하게 펼쳐졌다.

전문가들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지지층을 결집하고, 상대 진영을 공격하는 용도로 국민청원장이 변질되면서 소수자나 약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론장 역할을 다 하지 못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청원 시스템이 올바르게 작동하기 위한 국민적 문화가 조성돼야 한다”며 “지난 5년간의 청원을 유형화해서 절제할 것은 절제하고 어디에서도 호소할 수 없는 것들은 여기 와서 풀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가현 기자, 서민철 인턴기자 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