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의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연극반이 앞다퉈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1905년 제정 러시아 지배 시절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가족을 다룬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발생한 민간인 학살과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원작은 1905년 포그롬(제정 러시아에서 일어난 조직적인 유대인 탄압) 이후 미국으로 건너온 작가 숄렘 알레이헴(1859~1916)의 연작소설 ‘우유 배달부 테비에’다. 중유럽 유대인의 언어로 독일어에 히브리어와 슬라브어가 섞인 이디시어로 쓰였다. 우유 배달부 테비에는 유대인 전통을 유지하려 하지만 사랑하는 딸들을 위해 변화를 받아들이고 포그롬 때문에 고향을 떠나는 내용이다.
19세기 후반 이디시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알레이헴은 자신의 소설을 무대화하고 싶어했다.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사후 공연으로 만들어졌다. 1960년대 들어선 작곡가 제리 복, 작사가 쉘든 하닉, 극작가 조셉 슈타인이 뮤지컬을 만들었다. 뮤지컬 제목은 제정 러시아 시절 벨라루스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귀화한 유대인 화가 마르크 샤갈의 바이올린 연주자들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정했다. 샤갈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유대인 행사에서 빠지지 않는 바이올린 주자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뮤지컬이 알레이헴의 소설을 그대로 담지는 않았다. 소설은 비극으로 끝나지만, 뮤지컬은 미국적 희망을 이야기한다. 뮤지컬에선 테비에 부부가 시집 안 간 딸들을 데리고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지만, 소설에선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다. 당시 제정 러시아에 살던 유대인들은 19세기 말 ‘약속의 땅에 나라를 세우자’는 시오니즘 운동의 영향으로 팔레스타인에 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착 과정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데, 소설에선 팔레스타인에 온 후 딸이 시집 간 가족과 문제, 테비에 아내의 죽음 등 디아스포라의 슬픔이 짙다. 뮤지컬에선 러시아인과 결혼한 셋째 딸 부부가 자발적으로 마을을 떠나지만, 소설에선 러시아와 유대인 공동체 모두에서 쫓겨난다.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에는 당대 브로드웨이 최고 프로듀서인 해롤드 프린스와 연출가 겸 안무가 제롬 로빈스가 합류했다. 하지만 작품이 너무 유대인적이라 주류 관객을 끌어들이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원래 유대인이지만 유대인의 정체성을 감추기 위해 이름까지 바꾼 로빈스가 연출을 맡은 것도 뒷말을 낳았다. 그러나 1964년 초연된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관객과 평단의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뮤지컬의 대표 넘버인 ‘선라이즈, 선셋’(sunrise, sunset)의 선율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해 토니상에서 작품상, 연출상, 대본상, 음악상 등 9개 부문을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1971년 영화로 만들어져서 이듬해 아카데미에서 영화음악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했다.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한국에서도 자주 공연됐다. 서울시뮤지컬단은 1985년부터 98년까지 6차례 무대에 올렸다. 지난해에는 창단 60주년 기념작으로 공연했다. 한국에서 이 작품은 지난해까지 가족애를 다룬 고전 뮤지컬로 인식됐을 뿐, 본질적인 주제인 디아스포라의 비극은 주목받지 못했다.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잘 모른 채 딸들의 결혼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 가족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지난 22일부터 다음 달 8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다시 오르는 서울시 뮤지컬단의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맞물려 예전과 다르게 다가온다. 극 중 우크라이나의 수도를 과거 러시아어 발음인 ‘키예프’ 대신 우크라이나어 발음인 ‘키이우’로 바꾼 것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의 표시다.
우크라이나에선 개전 이후 500만명이 해외로 피난 가 난민이 됐으며 민간인과 군인을 합해 수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테비에가 유대인들은 떠나라는 명령서를 가져온 러시아군 장교에게 처음으로 대항하며 “내 땅에서 꺼져”라고 말하는 모습이 큰 울림을 준다. 우크라이나인은 물론 전쟁에 반대하는 전 세계 사람들이 푸틴과 러시아군에게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