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사 크리스티가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쓴 6권의 소설이 있다. 심리소설이라 부르는 장르인데, ‘나는 이런 소설도 잘 쓸 수 있어!’라는 듯 애거사의 문학적 성취가 돋보이는 걸작이다. ‘내가 죽고 50년 뒤에야 내가 썼다는 사실을 밝히시오’라는 로맨틱한 배경까지 안고 있다.
그 가운데 ‘봄에 나는 없었다’의 내용은 이렇다. 우리에게 비유하자면 서울 사는 여인이 부산 딸네 집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태풍을 만나 도로가 끊기고 인터넷도 되지 않는 어느 산골에 일주일쯤 고립돼 있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며 인생을 찬찬히 돌아보는 이야기다. 세상을 잘 살아 왔다 자부해 왔고, 주위 이런저런 문제는 다른 이들에게 문제가 있는 탓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돌아보니 다 ‘내 탓’이더라는 것이다. 탁월한 심리묘사와 인간 본성에 대한 처절한 해부가 소름 끼칠 정도다.
1944년에 출간한 책이지만 어제 나왔다고 말해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세련됐다. 좋은 소설은 이런 소설이 아닐까 싶다. 오래전 작가가 썼는데 21세기 지금 이야기를 하는 것 같고, 머나먼 나라 사람이 썼는데 지명과 인물만 바꾸면 한국의 현실이라 말해도 별로 틀림이 없을 것 같은 보편성을 담고 있는 소설. 그때나 지금이나, 거기나 여기나, 인간은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니까. 최근 어느 명사의 에세이를 읽다가 ‘소설을 읽지 않는다’는 내용에 잠깐 멈칫했다. 경제나 실용 서적만 읽는다는 것이다. ‘너무 바빠 소설은 읽을 시간이 없다’는 뜻으로 들리기도 했고, 내 삐딱한 시선으로는 ‘나는 세상과 인생을 알 만큼 알기 때문에 고작(?) 소설 따위는 읽을 필요 없다’고 해석되기도 했다(역시 삐딱하군).
소설을 읽는 이유는 소설의 가짓수만큼이나 다양하다. 정해진 독법(讀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는 스토리 위주로 술술 잘 읽히는 소설을 찾고, 다른 누구는 주제 의식이 느껴지는 소설을 선호하며, 또 다른 누구는 아름다운 문장에 목말라 소설을 펼친다. 절대선이란 없다. 그저 좋아 즐기면 되는 것. 하지만 우리가 “서울 아줌마가 여행하다 고립돼 겪는 일”이라고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는 이야기를 굳이 찾아 읽는 이유는 세상과 사람의 내면을 천천히 그리고 묵직하게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로 한두 시간이면 빨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를 우리는 책으로 읽는다. 공들여 오래 읽는 이유는 그만큼 집요하게 헤아리며 소설 속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이렇게 생겼다고 감독이 눈으로 보여주는 세상보다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창조할 수 있는 세상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영화나 드라마는 격이 떨어진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팀 버튼이 만들어낸 원더랜드의 모습은 훌륭하기 그지없지만, 어린 시절 우리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으며 수천수만 자신만의 원더랜드를 상상 속에 꿈꾸면서 자랐다.
나를 돌아보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당신을 느끼고 세상을 배우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인생의 많은 교훈은 ‘정직하게 살라’ ‘베풀며 살라’는 식의 한 문장으로 충분하지만 우리는 굳이 한 권의 책을 통해 그것을 증명하고 또 증명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에서 진즉 전달했던 메시지를 2022년의 소설가가 새로운 버전으로 지겹도록 풀어놓는 이유도 그것과 같다.
지난해 우리나라 성인 평균 독서량은 4.5권으로 6년 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다. 이런 통계는 이제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지만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성인이 절반가량이다. 그런 가운데 소설의 위상은 더욱 끔찍하다. 그러고도 이른바 K컬처가 세계를 휩쓴다니, 역시 기묘한 일이다.
봉달호 작가·편의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