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지하철 시위

입력 2022-04-26 04:08

“세금으로 먹고사는 주제에 납세자들 일 못 하게 무슨 짓이냐.” “쥐꼬리 세금 내면서 무슨 염치로 바라는 게 이렇게 많나.” “차별은 싫고 장애인 특별대우는 괜찮나.” “활동지원예산 2조9000억원? 결국 돈 받아먹으려고 그 짓 했던 거네.” “없던 장애인 혐오가 절로 생겼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지하철 시위를 찾아보다 온라인에 넘쳐나는 조롱에 놀라고 말았다. 피곤한 출근길에 시위로 열차가 늦으면 짜증스러운 게 당연하다. 많은 이들이 당황하고, 허둥대고, 화가 났다. 인구 950만명 넘는 서울의 지하철 통행 분담률은 2019년 기준 41.6%로 버스(24%)보다 월등히 높다. 열차 한 대가 몇 분만 늦어도 수천명이 연쇄적으로 피해를 보고, 출근길은 전쟁터가 된다. 전장연이 지하철 시위를 한 건 지난해 12월부터 총 27차례. 중단과 재개를 반복할 동안 생긴 직접 피해자만 최소 수만명일 테니 비판이 없을 수는 없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성난 시민들이 쏟아낸 비난의 수위였다.

개인적으로는 전장연의 시위 방식, 즉 불특정 다수의 불편을 초래하는 시위도 용인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 사회는 그로 인한 혼란을 감당할 힘이 있다. 그러나 누군가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에 분노한다면, 시민에게 피해를 주는 시위 방식은 틀렸다고 주장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버스에 장애인용 리프트가 보편화된 건 1978년 덴버의 버스 시위 이후였다. 당시 사진을 보면 장애인들은 노선버스 앞에 드러누운 채 하룻밤을 새우는 교통방해 시위를 벌여 ‘리프트 버스 231대 도입’이라는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지금 관점에서 40년 전 출근길 불편은 진보를 위한 사소한 비용이지만 그날 덴버 시민들은 다르게 느꼈을지 모른다. ‘덴버포스트’ 기사 제목이 ‘장애인 시위로 교통 마비’였던 걸 보면 그때도 반감은 컸던 것 같다. 왜 아니겠나. 시민이 허락하는 불편의 한계가 어디인지 정답은 없다. 갈등은 피할 수 없다.

그러니까 이상한 건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아니다. 주장과 갈등은 협상과 경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내가 납득하기 어려운 건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를 명분으로 공동체 내부에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 맹렬하고 공격적인 장애인 비하의 열기이다. “장애인 차별은 나쁜 거라고 생각하지만 시위를 보니”라며 입을 떼는 이들은 서로의 혐오 발언을 지지대 삼아 장애 비하로 곧장 미끄러져 들어간다. 부끄러움도 없다.

비난 여론에 폭발력 있는 출구를 뚫어준 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였다. 전장연이 특정 정치세력과의 거래를 의심할 만큼 특혜를 받은 단체는 아니다. 이 대표는 가장 밑바닥에서 싸워온 당사자들에게 친정부라는 딱지를 붙여 정치적 패거리 싸움의 최전선으로 밀어 넣었다. 정치가 개입하니 비난이 쉬워졌다. 지금 전장연을 향한 비난 댓글의 절반쯤은 전장연의 친정부 성향을 비판하는 우파 네티즌의 욕설로 도배돼 있다.

전장연을 정치에 끌어들인 건 장애인 비하를 정치적 올바름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부수적 효과를 냈다. 예전이라면 눈총받았을 발언들도 정치비평의 외피를 쓰고 무차별적으로 유통된다. ‘장애인이란 특권을 내세워’ ‘더 달라고 아우성치는’ ‘호의를 권리로 착각하는’ 장애인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전장연이 이념을 위해 시민에게 피해를 준 ‘비문명적’ 시위꾼이기 때문이다. 이 대표라는 우두머리 스피커의 뒤에서 사람들은 장애인 비하의 윤리적 금기를 홀가분하게 벗어던졌다.

그러고 보면 페미니즘에만 백래시가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소수자 혐오도 퇴행과 함께 온다. 전장연을 먹잇감으로 분출한 온라인 혐오는 우리가 겪게 될 전방위 퇴행의 전조 같은 걸까.

이영미 영상센터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