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길은 수업에서 학생들과 함께 읽은 책 한 권을 생각나게 한다. 스탠리 존스가 쓴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이다. 저자는 1907년부터 일평생 인도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간디, 타고르와 평화운동을 함께했다.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예수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을까. 책 제목이 낯설면서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인도의 길까지는 아니더라도 갈릴리 해변을 걸으시는 모습을 왜 상상해보지 않았을까. 여느 기독교인들처럼 어린 시절부터 예수의 모습은 내게도 늘 한 가지였다. 항상 가시관을 머리에 이고 앙상한 뼈를 드러낸 채 십자가에 고통스럽게 매달려 있는 모습.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니 자동화된 이미지라고 표현해야 정확할 것이다.
학생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표정을 짓기에 상상력을 키워주려 엉뚱한 주문을 했다.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가 낯설다면, 갈릴리 해변을 걸으시는 상상은 어떤가. 뜨거운 태양 빛을 받으며 걸으시는 모습도 좋고, 고즈넉한 저녁 시간 생각에 잠기어 한가로이 해변을 걸으시는 모습도 좋고, 길을 걷다 아이들 뛰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는 모습도 좋고, 지친 얼굴로 길가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슬며시 다가가 말을 건네는 모습도 좋지 않은가.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준 행복의 시간이 적지 않은데, 왜 우리는 한 가지 모습으로만 그분을 기억하려 들까. 그것도 일상의 행복을 모두 집어삼킨 모욕과 고통의 순간을 금으로 박제화해 찬양의 대상으로 삼았을까. 주인 없는 빈 무덤에 그의 모욕감과 고통만을 다시 불러들여 가둬둔 꼴이다. 이보다 더 잔인한 형벌은 없지 싶다. 매달린 자도 바라보는 자도 고통이다.
우리 교회들이 예수께서 소중히 간직한 행복의 기억을 모두 쫓아버리고 고통의 기억만 부여잡고 생존해 온 것은 아닐까. 성서의 기록이 확인해 주듯 예수께서는 화려함을 자랑하는 솔로몬의 거대한 성전보다 너른 들판의 이름 없는 들꽃을 더 좋아하셨다. 소수의 사람에게만 접근이 허락된 성경을 들어 가르치시기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거리의 언어로 소통하기를 좋아하셨다. 작은 씨앗에서 큰 나무를 보는 농부의 눈길 하나, 함께 나눌 양식을 위해 매일 밀반죽을 하는 여인의 손끝 하나 놓치지 않으셨다. 그 안에 하나님 나라가 담겨 있음에 행복한 미소를 지으셨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성서가 전해주는 주옥 같은 비유가 어디서 나올 수 있었겠는가.
4월의 끝을 잡고 갈릴리 해변을 지나 한국의 길을 걷는 예수를 떠올려본다. 교회력은 부활의 시간을 선포했지만 대한민국의 달력은 여전히 치유되지 못한 고통에 멈춰서 있다. 위대한 희생만 기억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런 이름도 갖지 못한 4·3과 노란색만 보아도 눈물이 나는 4·16의 아픔은 무엇으로도 덮어지지 않는 상처다. 한국교회는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성화의 삶을 포기하고 성공을 위해 내달렸던 시간에 대한 대가는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한국교회는 가던 길을 멈추고 이제라도 너의 존재 이유가 무엇이냐 엄하게 묻는 예수께 무릎 꿇어 답해야 한다. 부끄러움도 없이 고통에 울부짖는 자를 조롱했던 시간에 대해 이웃과 하나님 앞에 사죄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세상과 분리된 예수는 행복할 수도 웃을 수도 없다. 고통이 있는 곳에 항상 그분이 계셨고, 그분이 계신 곳에서 세상의 희망이 다시 시작됐다. 이제 더는 교회가 그분을 독점할 명분이 없다. 고통이 있는 곳에 고통을 더하고, 위험이 있는 곳에 위험을 더하는 교회가 어찌 그분과 나란히 길을 걸으며 모든 이와 세상을 웃게 만들 수 있겠는가. 세상 위에 군림하려 드는 교회를 세상도 더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존재 이유를 잊은 종교는 세상에 고통만 더할 뿐이다. 펄 벅의 한마디가 묵직하다. “이 지상엔 사랑이 없으면 공포가 있을 뿐이다.”
하희정(감신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