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한 모피아… 연루자 명단 A4 2장 넘는다는데 ‘책임자 0명’

입력 2022-04-25 04:03

론스타 사건에는 정부 고위급부터 실무직까지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부 관계자들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돼 있다.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부터 매각, 그 이후 국제소송전까지 여러 정부에 걸쳐 20년째 사건이 이어진 탓이다.

최근 론스타 사건이 다시 주목받게 된 이유는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와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 등 새 정부 고위직 후보자들이 직·간접적으로 론스타 사태와 얽혀있기 때문이다.

론스타 사건의 발단은 외환은행 매각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던 1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외환은행은 노무현정부 때인 2003년 론스타에 매각됐고, 이명박정부 때인 2012년에 하나금융지주에 매각됐다.

론스타 사태의 정부 책임론을 제기하는 측에서는 ‘산업자본이어서 인수 자격을 못 갖춘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손에 넣은 뒤 다시 팔아 4조6600억원을 챙기는 데 정부가 묵인 또는 지원해줬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5조원에 가까운 이득을 본 론스타는 되레 ‘한국 정부가 고의로 매각 승인을 늦췄다’면서 한국 정부를 상대로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했고 늦어도 연내에는 마무리될 전망이다.

정부는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와 매각 승인의 주체였다. 외환은행 매각이 처음 구체적으로 논의된 건 2003년 7월이었다. 당시 이강원 외환은행장을 포함한 외환은행 관계자와 정부 관계자들이 2003년 7월 서울 한 호텔에서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입 건을 논의했다. 훗날 ‘10인 비밀회의’로 불린 이 회의에는 당시 재정경제부 변양호 금융정책국장과 추경호 은행제도과장 등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론스타에 외환은행 인수 자격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이뤄졌다. 검찰 수사 등에 따르면 추 후보자는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에 대한 ‘예외 승인’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을 작성했다.

한 후보자는 2002년 김대중정부의 청와대 경제수석에서 물러난 뒤 2003년 7월까지 론스타 법률대리인이었던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을 맡았다. 당시는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시도가 이뤄지던 때였다. 한 후보자는 또 론스타 사건에 대한 감사원의 특별감사가 진행된 2006년 노무현정부 경제부총리로 일했다. 당시 한 후보자는 “론스타 투자가 없었다면 외환은행은 파산 상태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근 한 후보자는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에 관여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거듭 부인하고 있다. 그는 “정부의 정책 집행자로서 (론스타 사건에) 관여한 적은 있지만 김앤장이라는 사적 직장에서 관여한 바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최근 취임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론스타가 산업자본이라는 점을 자인한 서류를 한국 정부에 전달했던 2008년 9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 이 총재는 최근 국회인사청문회에서 ‘이 총재는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할 수 없는 산업자본이라는 점을 알고도 덮었다’는 의혹 제기에 “론스타가 보내준 자료에 대한 확인 절차가 계속됐다”고 답했다.

론스타 소송을 대응한 사람 중에는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에 관여했던 인물도 있었다. 10인 비밀회의 멤버이자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 당시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추 후보자는 2015년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장으로 론스타의 ISD 소송 TF를 이끌기도 했다. 또 다른 10인 비밀회의 참석자였던 주형환 청와대 행정관은 2015년 당시 기획재정부 차관으로, 론스타 문제에 대응하고 있었다. 최근 추 후보자는 이와 관련해 “그동안 여러 절차가 진행됐고, 대법원에서까지 문제가 다 정리된 부분”이라고 해명했다.

정부 관계자는 24일 “론스타 사건이 시작된 노무현정부 이후 경제·금융 관련 고위 당국자들은 죄다 직간접적으로 관계돼 있다고 보면 된다”며 “관계자들 리스트는 A4용지 2장을 채우고도 남는다. 론스타 사건과 무관한 관료 찾기가 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보수와 진보 진영에 고루 있다는 점이 책임을 분산시키는 원인으로 꼽힌다. 책임이 분산된 게 아니라 고위급 책임자들이 일부러 책임 소재를 흐리게 한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모피아’(마피아+재무관료) 특유의 폐쇄성에다 끼리끼리 챙겨주는 조직 특성 탓에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책임 추궁이 필요한 관료들이 되레 승승장구한 배경에는 사실상 무위에 그친 검찰 수사가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2006년 시작된 검찰 수사는 변양호 전 재경부 금융정책국장의 ‘윗선’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수사 대상 중 최고위직이었던 변 전 국장은 고의로 자산을 저평가하고 부실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낮은 가격에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매각하도록 한 혐의로 기소됐지만 2010년 10월 무죄 판결을 확정받았다. ‘정책 판단과 실행, 이에 따른 손해에 대해선 배임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게 판결의 요지였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검찰 수사가 국제결제은행(BIS) 비율 조작에 매달리다가 정작 사건의 배후를 밝히지는 못한 채 성과를 내지 못했다”며 “모피아의 공고한 방어벽을 결국 뚫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변 전 국장의 면죄부는 이후 직급이 낮거나 관여 정도가 덜한 다른 관계자들의 책임을 면제해준 셈이 됐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론스타 사태 관계자들이 염치가 좀 있다면 사과를 해야 하는데 사과를 하는 순간 잘못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어서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한 합리화만 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