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반도체는 안보’라고 규정했다. 반도체 생산을 미국으로 다시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단순히 경제 논리에 그치는 건 아니라는 의미다. 21세기 ‘산업의 쌀’인 반도체가 없으면 첨단 산업뿐만 아니라 자동차 같은 전통 산업도 모두 멈춰버린다는 걸 인식해서다. 미·중 무역전쟁, 코로나19 등으로 반도체 공급 부족이 심화하면서 미국은 ‘반도체 중심주의’에 한층 무게를 싣고 있다.
TSMC 창업자 모리스 창 회장은 최근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가 주최한 토론회에 참석해 “반도체를 미국에서 생산하려는 노력은 매우 비용이 많이 드는 헛된 시도가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TSMC가 25년간 미국 오리건에서 공장을 가동했는데, 같은 제품을 대만에서 생산할 때보다 50% 비용이 더 들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미국은 1990년대까지 전 세계 반도체의 40%가량을 생산했지만, 현재는 10%가량으로 줄었다. 반도체 설계 등의 고부가가치 분야만 남기고 생산을 해외로 아웃소싱한 결과다.
단순하게 경제적 논리를 적용한다면, 미국에 공장을 지을 이유가 없는 셈이다. 때문에 미국은 정부 차원에서 세금 감면 등의 혜택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국가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서 해외로 갔던 반도체 생산시설을 다시 미국 안으로 옮기고 있다. 압박을 받은 주요 기업은 이미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결정했다. 삼성전자, 인텔, TSMC 등이 최근 몇 년간 미국에서 결정한 투자 규모만 930억 달러에 달한다. 업체별로 인텔 400억 달러, TSMC 360억 달러, 삼성전자 170억 달러 등이다.
삼성전자가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공장을 짓기로 결정하는 과정은 미국에서 얼마나 반도체 공장 유치에 적극적인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인구 1만7000여명의 소도시인 테일러는 지난해 11월 애리조나, 오스틴, 뉴욕 등의 쟁쟁한 경쟁자를 제치고 삼성전자의 최종 낙점을 받았다. 원래는 기존 삼성전자 파운드리 공장이 있는 오스틴이 유력했다. 하지만 테일러 시 정부에서 오스틴보다 많은 세금 혜택을 약속하면서 승리를 거뒀다. 테일러시는 10년간 재산세의 90% 이상을 되돌려주기로 했다. 금액으로 2억4000만 달러에 이른다. 테일러시가 속한 윌리엄슨카운티도 10년간 1억1400만 달러 규모의 세금 감면을 해주기로 했다. 테일러시 독립교육구(ISD)는 10년간 3억1400만 달러가량의 인센티브도 제공한다. 모두 합하면 10년간 6억6800만 달러(약 8300억원)에 달하는 규모다. 여기에 안정적 전기·용수 공급도 약속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텍사스주의 대규모 정전사태로 한동안 오스틴 공장 가동을 중단해야 했다. 반도체 공장은 한번 멈추면 막대한 손해를 입기 때문에 안정적 전기 공급이 필수다.
미국 정부와 테일러시에서 보여준 전폭적 행보는 한국 상황과 대조적이다. 2019년 정부 등에서 의욕적으로 발표한 경기도 용인시 반도체 클러스터는 3년째 첫 삽도 뜨지 못하고 있다. 오는 8월 시행을 앞둔 ‘국가첨단전략산업 특별법(반도체 특별법)’은 인재 육성, 세금 감면 등에서 산업계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에 국가 차원의 전략적 대응이 시급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개별 기업의 문제로 넘기지 말고 정부에서 반도체 산업의 발전을 지원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반도체가 국가안보를 결정짓고 있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은 24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부족한 인력 양성,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분야의 높은 수입의존도 해소, 메모리 외 분야 경쟁력 강화, 인프라 관련 규제 완화라는 4가지 과제를 떠안고 있다”며 “이걸 해소하기 위해선 정부가 직접 컨트롤타워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반도체 공급에 따라 자동차나 스마트폰 등 주요 산업의 생산력이 좌우되고 있다. 반도체 수급망 안정화는 한 국가의 산업경쟁력 강화와도 같은 말이 된 만큼 정부가 ‘경제·국가 안보’ 측면에서 지원책을 펼쳐야 한다”고 덧붙였다.
‘사람’ ‘부지’라는 2가지 실타래부터 풀어야 한다. 반도체 업계는 부지 확보를 가장 큰 걸림돌로 지목한다. ‘수도권 공장 총량제’ 안에서 부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수도권에 반도체 생산시설이 자리 잡기 쉽지 않다. 수도권 밖에 공장을 세우면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촘촘한 규제로 딜레마에 빠져 있는 셈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각 기업이 경쟁력 강화를 위해 투자를 하고 있지만 규제의 벽, 인재 부족 같은 현실적 문제에 부딪히고 있다”면서 “지역사회나 국가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면 기업이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을 정부에서 만들어줘야 한다. 생산시설을 확대하려고 해도 인허가에 막히는 일은 없어야 하고, 인재들이 걱정 없이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준엽 전성필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