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휴먼을 묻는다’… 초현실적 상상력의 축제

입력 2022-04-24 21:45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리는 제59회 베니스비엔날레 미술전이 23일(현지 시간) 공식 개막해 7개월의 대장정에 들어갔다. ‘나선’을 주제로 열린 한국관에 메인 작품인 키네틱 조각 ‘크로마’가 거대한 은빛 용처럼 매달려 있다. 한국관은 95년 개관 이래 처음으로 천장을 뜯어내 외부 풍경을 끌어들임으써 좁은 전시장이 주는 심리적 경계를 확장했다.

제59회 베니스비엔날레 미술전이 3일간의 프리뷰를 거쳐 23일(현지시간) 공식 개막했다. 자르디니 공원과 아르세날레 일대에서 펼쳐지는 베니스비엔날레는 총감독이 큐레이팅하는 국제전(본전시)과 국가별로 경쟁하는 국가관 전시의 두 축으로 이뤄진다.

‘나선’ 주제로 경계 허문 한국관

한국관을 함께 꾸린 김윤철 작가(왼쪽)와 이영철 감독.

자르디니 공원 1번지는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유럽 선진국 국가관이 밀집한 구역이다. 정면의 열주가 제국주의 시절의 위용을 자랑하는 듯한 이들 국가관 옆 구석진 자리에 한국관이 있다. 한국관은 1995년 당시 26번째 마지막 국가관으로 생겨났기 때문에 위치도 규모도 옹색하기 짝이 없다. 화장실이었던 사각진 건물 한 동에 둥근 원호 모양의 투명한 전시관을 추가한 기형적인 구조라 전시도 쉽지 않다. 신축론까지 불거진 악조건을 이겨내고 한국관이 올해 놀라운 변신을 했다. 사상 처음으로 천장을 뜯어내고 통유리 창을 가리던 가림막까지 제거해 외부 풍경을 실내로 끌어들였다. 전통 건축의 ‘차양 효과’를 떠올리게 하는 전시 문법은 한국관 참여 작가인 김윤철(52) 작가가 제시한 전시 주제인 ‘나선’의 개념과도 통한다. 꽉 닫힌 폐곡선과 달리 닫히듯 다시 열리는 ‘나선’은 경계의 해체를 은유하며 상징한다. 인류가 코로나를 거치며 한 시대를 종식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야 함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진 듯 전시장 안에는 ‘크로마’ ‘임펄스(충동)’ ‘태양의 먼지’ 등 6개 작품이 설치됐다. 키네틱 설치작품으로 이번 전시의 메인인 ‘크로마’는 동양의 상상적 동물인 용이 우주에서 날아와 한국관에 나선을 이루며 착지한 듯한 인상을 준다. 용의 비늘 같은 700여개 몰드는 실리콘이 부착돼 기계가 움직일 때마다 오묘하게 색이 바뀐다. 김 작가는 “기계의 움직임에 따라 분자구조가 바뀌며 색상이 달라지는 것”이라며 “과학에선 이걸 구조색(스트럭처 컬러)이라 한다. 미래에는 염료로 색을 바르는 게 아니라 물질의 구조를 바꿔 색을 내는 시대가 온다”고 말했다.

뮤온 검출기가 수백 개의 눈처럼 달린 '아르고스'.

크로마의 움직임과 색상 변화를 끌어내는 주체는 이웃한 작품 ‘아르고스’다. 눈이 100개 달린 신화 속 동물 이름에서 딴 이 작품은 뮤온 입자를 검출하는 과학적 장치로 구성됐다. 아르고스가 뮤온 입자를 검출할 때마다 전시장 안의 다른 작품들에 신호를 보내며 ‘임펄스(충동)’ 등 다른 작품들에 영향을 준다. 이를테면 샹들리에처럼 매달린 임펄스를 구성하는 실린더의 액체는 아르고스의 신호를 받아 기포를 만들고 역류하는 등 반응을 한다. 과학과 미술의 경계를 허물며 신기한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인기를 끈 한국관은 미국 프랑스 벨기에 등 다른 국가관과 함께 올해 꼭 봐야 할 7개 전시에 뽑혔다. 계원예술대 교수인 이영철 감독이 함께 큐레이터로 참여한 한국관은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을 구현한다는 점에서도 주목받았다.

포스트 휴머니즘 다룬 본전시

‘꿈의 우유’를 주제로 한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는 초현실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포스트휴머니즘적 조건을 탐색한다. 아이티 작가 실레스틴 포스틴이 장미 가시 발을 가진 남자를 그린 회화.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 식물, 심지어 사물도 함께 지구를 구성하는 주인이라는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은 본전시 총감독이 내건 주제와 상통한다. 국가관 전시는 총감독이 내건 주제와 상관없이 꾸리지만 한국관 주제가 본전시와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은 코로나 이후의 시대적 고민을 공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총감독을 맡은 미국 출신 세실리아 알레마니가 큐레이팅하는 본전시 주제는 ‘꿈의 우유’다. 초현실주의적 상상에 착안한 꿈의 우유는 신체의 변형, 개인과 기술의 관계, 신체와 지구의 연결 등 세 가지 소주제로 구성된다.

알레마니 감독은 자신이 총지휘하는 본전시에 한국의 정금형(42) 이미래(34) 등 58개국 513명의 작가를 초청했다. 전시장은 초자연적이고 신화적인 상상력이 가득한 작품들로 채워졌다. 전시장에는 예년처럼 엄청난 스케일, 치솟은 탑, 휘두르는 채찍, 강철 소재 등 남성적 위용과 폭발하는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 없다. 대신 천과 자수, 뜨개질, 흙 등 부드러움과 자연을 연상시키는 소재와 기법이 전시장을 관통한다.

주제 면에선 인간과 동물, 인간과 식물, 기계와 인간 등 하이브리드적 공존을 강조한다. 소수민족과 페미니즘, 포스트휴머니즘이 추동하는 경계 해체의 사유가 기저에 흐른다. 구체적으로 식물이 된 사람, 돌로 변하는 호랑이, 인어공주 같은 인간, 나무와 하나가 된 인간 등 초현실적 상상력이 가득하다.

아이티 작가 실레스틴 포스틴이 인어공주, 장미 가시 같은 발을 가진 남자를 그린 회화가 그 예다. 독일 작가 로제마리 트로켈이 환경파괴를 경고하는 메시지를 던지듯 버려진 페트병과 합쳐진 인간 조각도 있다.

전시 쓰레기를 양산하는 가림막 대신에 천에 그림을 그려 가벽을 연출한 작품도 눈에 띈다. 콜롬비아 작가 델시 모렐로스는 진흙으로 거대한 입방체 구조물을 펼쳐놓았다. 이미래 작가의 설치 작품 ‘끝없는 집: 고정 및 낙하’는 인체의 장기를 매달아 놓은 것 같은 설치물로 메스꺼움을 유발한다. 키네틱 장치에 의해 촉수 모양 조각물이 순간적으로 몸을 돌리기도 하고 액체를 질질 흘리는 등 생명체의 기원을 상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정금형 작가의 작품 ‘장난감 프로토타입’은 가슴에 칩이 부착된 마네킹과 두상이 달린 마트용 끌차를 진열한 설치작품이다. 이는 기계와 인간 사이의 경계를 허물며 전시 주제의 한 갈래를 차지하는 사이보그를 연상시킨다.

융합·여성, 인권·파격의 국가관

아프리카인의 디아스포라적 삶을 주제로 한 미국관의 외부.

올해 국가관 최고상(황금사자상)은 영국관이 가져갔다. 흑인 예술가로는 역대 처음으로 영국관 작가로 참여한 소니아 보이스가 다채로운 영상과 노래, 음성 작업을 융합한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영국관이 국가관 시상제가 생긴 1985년 이래 최고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본전시에서 최고 작가상(황금사자상)을 받은 시몬 레이가 국가관 작가로 참여한 미국관의 경우 서구 국가에서 이중삼중의 억압을 받아온 흑인 여성 문제를 토속적인 설치 작업과 조각 작품으로 풀어냈다. 흑인 여성이 미국관 작가가 된 것도 처음이다. 올해 베니스비엔날레에선 황금사자상 두 개의 영예가 모두 흑인 여성에게 돌아갔다.

독일관은 건물 내부 벽을 뜯어내고 바닥 밑을 발굴해 전시장 안을 고고학적 유적처럼 꾸몄다. 스페인관은 내부에 어떤 설치물이나 회화, 영상도 없이 완전히 흰색으로만 된 구조물 자체를 전시품처럼 꾸미는 파격을 보였다. 지붕을 뜯어내고 유리창을 통해 하늘을 끌어들인 점에선 한국관과 닮았다. 우간다관과 함께 ‘주목할 만한 언급상’을 받은 프랑스관은 벨 에포크(19세기 말~20세기 초의 좋은 시대)를 배경으로 거실과 바 등 드라마 세트장처럼 꾸민 전시장에서 배우가 퍼포먼스를 했다. 스칸디나비아관은 올해만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에 걸쳐 거주하는 토착민인 사미족을 위한 공간으로 대여했는데, 사미족 고난의 역사를 다른 회화 연작이 눈길을 끌었다. 11월 27일까지.

베니스=글·사진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