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욱의 슬기로운 금융] 물가 안정이냐… 경기 회복이냐… 정책 딜레마

입력 2022-04-25 04:07

지난 3월 미국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이 40년래 최고 수준인 8.5%에 달했다. 후진국에서나 볼 법한 수치에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 놀라운 점은 아직도 정점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날이 치솟는 물가로 11월에 있을 미국 중간선거에서 조 바이든 정권의 민주당은 상하원의 과반을 내줄 위기에 몰렸다. 고물가가 정권교체의 마중물로 작용했던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지금은 세계적인 현상이 돼 버렸다. 페루나 파키스탄과 같은 나라에서는 물가 급등으로 대규모 소요 사태가 일어나고, 어제 결선투표가 끝난 프랑스 대선에서도 최대 현안은 물가였다. 바야흐로 물가가 사회를 흔들어대는 시대가 된 것이다.

물가 안정 위한 ‘돈줄 죄기’는 경기 둔화 야기

사람들은 최근 세계적인 물가 불안의 원인으로 러시아 침략 전쟁이나 코로나19로 인한 공급망 차질을 꼽고 있지만, 사실 물가는 시중에 있는 돈의 양이 좌우하는 것이다. 물가는 돈으로 채워진 욕조통에 떠 있는 상품값의 다른 이름이다. 돈이 늘어 욕조통이 차오르면 상품 가격은 올라간다. 다만 평소보다 공급이 줄어든 물건이 있다면 그 물건값은 더 오른다. 그래서 마치 그 물건이 전체 물가를 좌우하는 것처럼 착시를 일으킨다.

게티이미지

최근 전 세계 물가 수준을 한 단계 올려버린 에너지가 좋은 예다. 러시아 침략 전쟁으로 석유 공급이 여의치 않아지자 유가가 다른 품목보다 더 높게 상승해 전쟁이 물가 불안의 원흉으로 보이지만, 실제 물가 상승을 주도하는 것은 유동성이다. 그런 까닭에 전쟁이 끝난다고 해도 시중 유동성이 적절한 수준으로 회수되지 않는다면 물가 불안은 계속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는 돈줄 죄기를 시작했다. 지난달 기준금리를 0.25%로 올린 데 이어 다음 주에는 평소 금리 조정 폭의 두 배에 달하는 0.5% 포인트나 올릴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날뛰는 물가를 잡기 위해서는 큰 폭의 금리 인상, 그것도 두어 번 연속해 실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금융시장도 연준의 물가에 대한 비타협적 태도를 확인한 것 같다. 금년 말까지 기준금리가 3%까지 오를 것으로 보는 금융기관이 나왔을 정도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장 참가자는 급속한 돈줄 죄기가 경기 침체를 야기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그 증거로 장단기채권의 수익률 역전을 댄다. 과거 수십년 동안 이들 수익률 격차가 역전될 때마다 경기 침체가 들이닥쳤던 경험에 근거한 것인데, 실제로 작년 말 1% 포인트였던 미국 10년물 국채와 2년물 국채의 수익률 차이가 지난주에 0.15% 포인트로 붙어버렸다. 시장에서는 이 두 수익률이 조만간 역전될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내년이나 내후년에는 미국 경기가 침체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하지만 연준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지금으로선 금리가 오르더라도 부작용은 거의 없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이 자신감의 근거는 고용 상황이다. 미국 실업률은 코로나 직후 15% 가까이 치솟았다가 지난달에 완전고용 수준인 3.6%까지 떨어졌다. 연준은 앞으로 경기가 더 좋아지더라도 물가만 자극될 뿐이기에 이를 식혀줄 금리 인상이 시급하다는 입장이다.

美 정책 전환은 우리의 위험으로 다가올 수 있어

미국이 통화정책을 긴축으로 전환한다면 정작 위험에 빠질 곳은 미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이다. 예를 들어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 세상의 돈은 미국으로 향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상당수 나라는 돈이 빠져나가고 이로 인해 투자 위축, 실업 증가 등을 겪게 된다. 심할 경우에는 외환위기가 올 수도 있다. 물론 위기의 정도는 그 나라의 경제 체질이 얼마나 튼튼한가에 달려 있지만 미국과의 금리 차도 중요한 요인이 된다. 여러 나라가 앞다퉈 금리를 올리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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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도 작년부터 금리를 올리면서 이런 상황에 대비해 왔지만 불안감은 여전하다. 비록 우리나라 소비자물가가 지난 3월 10년 만에 최고치(4.1%)를 찍기는 했지만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훨씬 낮다. 하지만 넋 놓고 있다가는 자본 유출은 물론이고 환율마저 급등해 물가가 더 불안해질 수 있다. 그렇다고 금리를 올리는 시늉만 하다가는 물가는 잡지도 못하고 물가 상승 기대심리만 자극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바로 부동산 등 실물자산에 대한 투기가 불어닥칠 것이다. 이처럼 물가에 대한 미온적 대응은 더 큰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기에 채택하기 곤란해 보인다.

그렇다면 금리 인상을 포함한 적극적인 긴축 정책을 추진해야 하는데 이때는 경기가 걱정이다. 금년도 4% 정도의 경제성장을 예상하는 미국도 금리 상승으로 인한 경기 침체를 우려하는데, 2%대의 성장률이 예상되는 우리로서는 조마조마하다. 더구나 코로나로 내수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데다 세계적인 금리 상승으로 세계 경기 또한 둔화된다면 우리의 강점인 수출도 기대에 못 미칠 수 있다. 그래도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만 있다면 장기적인 성장가도에 들어설 수 있다는 점에서 한 번 시도해볼 만한 정책 옵션이다.

다만 긴축으로의 방향 전환이 거시경제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다. 요즘 우리 회사를 떠나는 젊은 직원들이 많다는 기사를 보았다. 급여는 사실상 정부가 정하기에 민간기업에 비해 낮은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감사원 지적에 따라 건강검진 혜택이 줄어드는 등 실질적인 소득이 줄어든 데 따른 것이 아닌가 싶다. 해가 갈수록 내리막을 타는 직장에 마음을 두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우리 회사에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 전체가 이와 유사한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일지 모른다. 금리가 빠른 속도로 오르게 되면 코로나 이전부터 미뤄왔던 구조조정이 본격화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실질 급여가 줄어드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된다. 다른 직장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야 다행이지만 물러설 곳이 없는 사람들은 머리띠를 두를 것이다. 이제 거리에서 항의 시위를 보는 것이 일상이 될 수도 있다. 과연 우리는 물가 안정, 즉 중장기적인 견실한 성장을 위해 눈앞의 경기 둔화와 사회 혼란을 참아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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