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은 크기의 반도체 칩을 놓고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반도체는 또 다른 ‘산업의 쌀’로 성장했다. 반도체 생산능력 확보가 국가안보와 직결되면서 미국 유럽 중국 등은 사활을 걸었다. 자국 안에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는 게 핵심이다.
반면 한국은 공장 하나 짓기도 어려운 상황에 빠져들었다. 이대로라면 반도체 전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정부 등에서 2019년 의욕적으로 발표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 수도권 공장총량제 같은 규제를 뚫는 데에만 2년가량 걸렸다. 용지 확보, 지장물 보상, 문화재 발굴 조사 등의 ‘허들’도 남아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21일 “정해진 절차를 따라야겠지만 그때마다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추진할 동력이 약하다보니 더딜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2025년까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안에 생산라인을 지으려던 SK하이닉스는 2026년 이후로 시기를 연기했다.
현재 전 세계 반도체의 80%를 한국 대만 등 아시아 지역에서 생산한다. 메모리반도체는 70%가량을 한국에서, 시스템반도체는 절반 이상을 대만 TSMC에서 만든다. 미국과 유럽은 아시아에서 자국으로 공급망을 옮겨 틀을 다시 짜겠다는 전략을 밀어붙인다.
미국 정부는 반도체를 안보자산으로 규정한다. 상·하원은 520억 달러(약 64조2000억원) 규모의 반도체 지원 법안을 통과시켰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삼성전자, TSMC, 인텔 등의 주요 기업을 불러 미국 내 공장 건설을 강하게 압박했다. 결국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TSMC는 애리조나에 공장을 짓기로 했다.
유럽연합(EU)도 분주하다. EU 집행위원회는 현재 9% 수준인 반도체 생산능력을 2030년 20%까지 늘릴 방침이다. 공공과 민간에서 430억 유로(약 57조4600억원) 이상의 투자를 끌어모을 계획이다. 인텔은 올해 3월 유럽에 10년간 110조원 투자 계획을 발표했고, 애플은 지난해 독일을 유럽 반도체 설계 거점으로 삼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미국 견제로 주춤한 중국도 반도체, 인공지능(AI) 등의 첨단산업을 대상으로 ‘소비 내재화’에 속도를 낸다. 중국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반도체 수요가 많은 나라다. 최첨단 반도체를 만들 능력은 없지만 급증하는 수요를 자국 기업이 감당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와 달리 한국은 올해 1월에야 ‘국가첨단전략산업 특별법(반도체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그나마도 ‘세제 혜택’ ‘인재 육성’에서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수도권과 대기업에 혜택이 쏠리면 안 된다는 이유로 축소한 지원책이 많아서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은 “반도체 관련 정책은 다 시급한 사안이라 동시 시행이 중요하다. 속도전을 펼칠 수 있도록 전방위적 검토·지원과 구체적 실행방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준엽 전성필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