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대열에 갓 합류한 남모(28)씨는 요즘 들어 퇴근 후 자취방에서 저녁식사를 하며 ‘대장금’을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남씨가 초등학생였을 때 방영한 ‘옛날 드라마’이지만, 최신 ‘먹방’에 버금갈 정도로 음식을 다루는 장면이 자주 나와 식사를 하며 보기 적당하다고 느낀다고 한다. 심지어 화질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고 한다. 인공지능(AI) 기술로 화질을 개선하면서 SD급에서 FHD(Full-HD) 급으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남씨는 “또래 사이에서 고화질로 개선된 옛날 영상물을 찾아보는 게 취미처럼 여겨지고 있다. 옛 시절의 정서를 느낄 수 있어 색다르다”고 말했다.
‘레트로’(복고풍)가 열풍이다. IT기업들도 ‘향수’를 겨냥하고 있다. 기성세대뿐 아니라 청년층 사이에서 과거 콘텐츠 수요가 늘자 옛 영상을 고화질로 복원해 재방영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까지 등장했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플랫폼들은 ‘향수 콘텐츠’ 확보에 뛰어들고 있다.
21일 IT업계에 따르면 SK텔레콤은 레트로 콘텐츠 복원기술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글로벌 보안기업 베리매트릭스와 AI를 기반으로 하는 미디어 품질개선 솔루션 ‘슈퍼노바’를 활용해 리마스터링 콘텐츠 사업을 공동 추진한다. 슈퍼노바는 SK텔레콤 5대 사업 가운데 하나인 미디어 사업군을 이끄는 핵심 기술이기도 하다. 주로 AI 딥러닝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오래된 영상이나 음원 화질을 탈바꿈시킨다. 현재 방송(MBC 과거 콘텐츠 화질 개선)이나 공공기관 영상물(독립기념관 기록물 복원), 스포츠 콘텐츠를 최신 영상처럼 복원하는 등 여러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SK텔레콤은 해외 방송사나 콘텐츠 제작사가 보유한 ‘올드 콘텐츠’를 슈퍼노바로 리마스터링한 뒤 남미·유럽·아시아 시장에 공개해 레트로 열풍에 뛰어든다는 포석을 깔고 있다.
레트로 마케팅은 이미 큰 흐름이다. LG전자는 부산 광안리 더 브릿지 호텔에 ‘금성오락실’이라는 테마 공간을 마련했다. 고객이 게임뿐만 아니라 과거의 추억을 경험하는 동시에 LG전자의 제품을 체험할 수 있도록 꾸민 곳이다.
KT는 ‘카세트 테이프’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자, 지난해 3월부터 카세트 플레이어 굿즈세트인 ‘카세트’(KASSETTE)를 판매하고 있다. 이 세트는 블루투스 기능을 넣은 카세트 플레이어, 인기 가수들이 리메이크한 1990년대 노래를 담은 카세트 테이프로 구성됐다. 출시 보름 만에 준비한 5000대를 완판했다.
OTT 업계에선 향수를 자극하는 콘텐츠를 확보하는 경쟁이 뜨겁다. 신규 콘텐츠에 레트로 정서를 입히는가 하면, 시대별로 콘텐츠를 분류해주는 서비스를 도입한다. 티빙은 콘텐츠에 반영된 과거 시대와 어울리는 드라마를 추천해주는 테마 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1990년대 말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방영되자 드라마 ‘시그널’ 등의 과거를 배경으로 하는 인기 콘텐츠, ‘화양연화’ 등의 해외 콘텐츠를 이용자에게 추천해줬다.
1990년대는 물론 2000년대에 크게 인기를 끌었던 콘텐츠를 재방영해 신규 회원을 확보한다는 전략도 펼쳐지고 있다. 웨이브는 1999년 국내 방영돼 시청률 37%를 기록했던 일본 애니메이션 ‘카드캡터 체리’의 더빙판을 공급 중이다. 넷플릭스는 1992년 첫 방영 후 30주년을 맞은 ‘세일러문’의 극장판을 공개하기도 했다. 왓챠 역시 ‘세일러문’을 비롯해 ‘빨간망토 챠챠’ ‘베르사유의 장미’ ‘배추도사 무도사’ ‘슬램덩크’ ‘검정 고무신’ 등을 꾸준히 방영 중이다. 산업계 관계자는 “과거의 콘텐츠를 보면서 기성세대는 추억을 떠올리고, 이후 세대들은 새로운 문화로 접한다. 이런 레트로가 하나의 소비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어떤 레트로 소재를 발굴해 상품화할지가 최근 기업들의 주요 과제다”고 말했다.
전성필 기자 f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