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혐오 벽 허물려면?” “시의 마음을 찾아내고 나눠야”

입력 2022-04-21 19:13 수정 2022-04-21 19:20
시인 이문재(왼쪽 첫 번째)와 소설가 은희경(두 번째)이 20일(현지시간) 콜롬비아 보고타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도서관에서 열린 한국문학 앤솔로지 출간 기념 행사에 참석해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제공

“은희경 작가님은 냉소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왜 그런가요.”

사회자의 질문에 느린 대답이 이어졌다.

“제 첫 책인 ‘새의 선물’ 주인공이 12세 소녀인데요, 그 소녀가 ‘더이상 성장할 필요 없다’고 말해요. 그 후로 저는 냉소의 작가로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따뜻한 소설을 쓰고 있다고 생각해요. 환상이나 상투성에서 벗어나 정확히 보려고 하는 것일 뿐이죠. 저를 냉소적이라고 보는 한국 사회가 너무 뜨거운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제 소설을 보시고 차가운지 따뜻한지 판단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다음 질문은 이문재 시인을 향했다. “시인님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뤄 왔습니다. 기후위기와 팬데믹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과 자연세계의 끈이 끊어진 결과가 지금 어떻게 나타나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제가 붙잡고 있는 화두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어떻게 재설정할 것인가입니다. 이번 보고타도서전 주제가 ‘공존’이고 ‘재회’인데요, 우리가 재회해야 할 첫 번째 대상은 천지자연이겠죠. 재회와 공존으로 가는 길에 문학의 역할이 지대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려받은 것보다 더 좋게 해서 물려주는 것, 이게 제가 생각하는 시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모든 진정한 좋은 시의 주어는 ‘인간’이 아니고 ‘인류’라고 생각합니다.”

1959년생 동갑내기인 은희경과 이문재가 지구 반대편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에서 고등학생 청중을 앞에 두고 자신의 작품을 소개했다. ‘2022 보고타국제도서전’ 이틀째인 20일 오전(현지시간) 두 사람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도서관에서 열린 한국문학 앤솔로지(선집) 출간 기념 행사에 참석했다.

콜롬비아에서 출간된 한국문학 앤솔로지 ‘마침내 끝이 시작되었다’ 표지. 대한출판문화협회 제공

‘마침내 끝이 시작되었다’라는 제목의 이 앤솔로지는 은희경 한강 정영수 김경욱의 단편소설과 이문재의 시를 스페인어로 번역해 수록한 책이다. 콜롬비아에서 아시아문학 선집이 출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책은 한국이 보고타국제도서전 주빈국 참가를 계기로 출판을 지원했으며, 콜롬비아 정부가 학교와 도서관, 공공기관 등에 무료로 배포한다. 5년간 5만부를 보급할 예정인데, 콜롬비아 사람들이 한국문학을 만나는 첫 책이 될 가능성이 높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이날 행사에서 콘수엘로 가이탄 보고타시 독서·도서관 본부장은 “한국인들이 마르케스를 읽으면서 콜롬비아와 중남미 문학을 알게 된 것처럼 콜롬비아 사람들은 이번에 출간된 한국문학 앤솔로지를 통해 한국문학을 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고타도서전을 방문 중인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참석해 “다른 나라의 이국적 소설들이 제 성장기에도 큰 영향을 줬다”면서 학생들에게 한국문학 앤솔로지를 읽어볼 것을 권했다.

청중석에는 인근 고등학교에서 온 학생들이 100여명 자리했다. 학생들은 손을 들고 작가에게 질문을 던졌다. “시가 증오와 혐오의 벽을 허무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냐”는 한 학생의 질문에 이문재는 “저는 ‘시’보다는 ‘시의 마음’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우리 안에 있는 시의 마음을 서로 찾아내고 나누는 것이 인류가 처한 위기를 해결하는 방법이 될 거로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은희경은 한국문학 앤솔로지를 통해 자신의 소설을 읽게 될 콜롬비아 독자들을 향해 “인간은 타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타인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나와 다른 점을 어디까지 이해해줘야 할까요. 그런 고민을 소설에 담았습니다”라며 “타인을 다시 발견하는 데, 세계를 더 넓게 발견하는 데 제 소설이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보고타=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