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인 배우의 아카데미 수상’… 기적 아닌 성취

입력 2022-04-23 04:08
지난달 제9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3관왕을 차지한 영화 ‘코다’의 스틸 사진. 주인공의 부모와 오빠 역에 실제 농인 배우가 출연했다. 판씨네마 제공

영화 ‘코다’는 지난달 제9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각색상, 남우조연상 3관왕을 차지했다. 한국에선 배우 윤여정이 남우조연상 시상을 맡아 청각장애인 배우 트로이 코처의 이름을 수어로 발표한 데 이어 코처가 수어로 소감을 전하도록 트로피를 들어준 모습이 화제가 됐다. 하지만 ‘코다’와 코처의 수상이야말로 미국 농인들의 오랜 노력과 성취를 상징하는 순간임을 놓쳐선 안 된다.

영화 제목인 코다(CODA)는 청각장애인(농인) 부모에게 태어난 비장애인(청인) 자녀(Children Of Deaf Adult)의 약자다. 부모와 오빠 모두 농인인 가족 속에서 홀로 청인인 주인공 루비가 겪는 혼란과 성장을 따뜻하게 그렸다. ‘코다’가 2014년 나온 프랑스 영화 ‘미라클 벨리에’의 리메이크임에도 작품상을 받은 것은 농인 배우들이 루비의 가족을 연기한 게 큰 역할을 했다.

‘미라클 벨리에’에선 청인 배우들이 수화를 배워 부모 역할을 연기했다. 농인의 시선으로 보면 어색한 부분이 많아 농인 문화에 대한 존중이 부족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코다’에선 배우 트로이 코처, 말리 매틀린, 대니얼 듀란트가 농인이어서 연기가 훨씬 자연스러운 것은 물론 작품의 진정성을 더해줬다. 매틀린은 1986년 ‘작은 신의 아이들’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베테랑 배우다. 이들 세 농인 배우의 공통점은 농인 극단인 데프 웨스트 시어터(Deaf West Theatre)에서 활동했다는 점이다. 특히 트로이 코처는 오랫동안 간판 배우로 활약하며 여러 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1991년 농인 배우 에드 워터스트리트가 로스앤젤레스에 설립한 데프 웨스트 시어터는 미국 서부에서 처음 설립된 수어 연극 극단이다. 고전부터 창작까지 다양한 수어 연극을 만드는데 농인은 물론 청인에게도 가치 있는 연극 체험을 선사하는 게 미션이다. 특히 청인과 농인이 함께 출연한 뮤지컬 ‘빅 리버’와 ‘스프링 어웨이크닝’은 언어가 중심 역할을 하는 게 당연시되던 뮤지컬 장르에 새로운 상상력과 감동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토니상 후보에 올랐다. ‘코다’의 코처, 매틀린, 듀란트는 ‘스프링 어웨이크닝’에도 출연했다. 데프 웨스트 시어터는 현재 장애인의 서사를 장애인 배우가 직접 연기해 성공한 영화 ‘코다’를 뮤지컬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다양성 분야 연구에 세계적 권위를 지닌 미국 USC 애넌버그 포용정책 연구소(USC Annenberg Inclusion Initiative)는 앞서 할리우드 영화에서 단 2%만 장애인 캐릭터이고 그중 5%만이 실제 장애인 배우가 연기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런 현실을 잘 아는 데프 웨스트 시어터는 농인 예술가를 육성해 프로 예술계에서 활동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청인 예술가와 공동작업을 통해 청각장애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농인 문화가 녹아든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왔다. 데프 웨스트 시어터가 최근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이 이끄는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를 청인과 함께 선보인 것도 그런 노력의 하나다. 덕분에 데프 웨스트 시어터는 프로 무대에서도 경쟁력을 가진 극단으로서 80개가 넘는 연극상을 받았다.

2012년부터 데프 웨스트 시어터의 예술감독을 맡은 DJ 쿠르스는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영화 ‘코다’의 성공과 코처의 아카데미상 수상이 영화계에서 농인 배우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줄 것”이라며 “농인 극단일 뿐만 아니라 좋은 작품을 만드는 극단인 우리에겐 훌륭한 배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국에선 장애나 장애 예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최근에야 개선되기 시작한 만큼 데프 웨스트 시어터 같은 수준의 단체가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다. 농학교에 연기 전공을 설치해 전문 농인 배우를 키워내고, 농인 극단이 활성화된 미국과 달리 한국에선 농인 배우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다. 국립정동극장이 지난 1월 무대에 올린 농인 소재 연극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이 대표적인 사례다. 농인 역에 청인 배우를 캐스팅한 것은 차치하고 농인 관객에 대한 고려 없이 개막했다가 비판을 받고 뒤늦게 자막이 나오는 PDA를 제공했다.

극단 핸드스피크의 ‘사라지는 사람들’은 ‘주인 없음’ ‘달빛 도망’ 2편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연극으로 농인 배우 7명과 청인 배우 6명이 출연한다.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이 이기적으로 변하는 모습을 우화적으로 그림으로써 현대사회의 균열을 막기 위해 구성원들이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함을 드러낸다. 사진은 ‘달빛 도망’의 한 장면. 세종문화회관 제공

그래서 다양한 수어 문화예술 콘텐츠를 기획 및 제작해 농인 예술가들의 지속가능한 일자리 창출을 위해 노력하는 핸드스피크의 활동을 주목해야 한다. 핸드스피크는 2010년 댄스팀을 만든 농인 예술가 3명과 기획사 담당자로서 인연을 맺은 청인 1명의 의기투합으로 시작됐다. 아시아 농댄스페스티벌과 프랑스 세계농인축제 등에 참가하면서 퍼포먼스를 통해 농인과 청인의 구분 없이 관객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농인의 예술 향유 및 참여 기회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18년 핸드스피크를 예비사회적기업으로 만들었다.

현재 26명이 소속된 핸드스피크는 산하에 극단, 댄스팀, 영상미디어팀, 디자인팀을 두고 있으며 댄스 연기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핸드스피크 출범부터 농인 아티스트들과 함께한 정정윤 대표는 “장애인에 대한 단순 지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수어 콘텐츠를 통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가려 한다”면서 “국내에 이런 사례가 없었기 때문에 책임감이 크다”고 밝혔다.

국립극단의 ‘이것은 어쩌면 실패담, 원래 제목은 인투디언노운(미지의 세계로, 엘사 아님)’의 한 장면. 농인 배우 박지영과 청인 배우 이원준이 서로를 이해하며 함께 연극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담았다. 박지영은 이 작품으로 올해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 여자연기상 후보에 올랐다. 국립극단 제공

가요를 수어 버전으로 만든 뮤직비디오 시리즈가 10만 조회 수를 넘기는 등 핸드스피크의 콘텐츠는 농인과 청인 모두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핸드스피크 극단도 처음엔 농인 배우로만 구성된 작품을 만들다가 최근 농인과 청인 배우가 함께하는 작품도 선보이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초청으로 19~20일 M극장에서 선보인 ‘사라지는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핸드스피크에는 최근 경사스러운 소식도 전해졌다. 핸드스피크 소속 배우 박지영이 지난 3월 청인과 함께 출연한 국립극단의 ‘이것은 어쩌면 실패담, 원래 제목은 인투디언노운(미지의 세계로, 엘사 아님)’으로 올해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 여자연기상 후보에 오른 것이다.

핸드스피크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장애예술을 모두 아우르는 정답이 될 순 없다. 하지만 배리어 프리(무장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장애예술이 오롯이 예술로서 인정받을 가능성을 보여준 것만은 분명하다.

다행히 장애(인)예술에 대한 첫 독립 법률인 ‘장애예술인 문화예술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장애예술인 지원법)이 제정돼 2020년 12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아직 부족하지만 관련 예산도 장애예술인 지원법 제정 이전인 2019년 138억원에서 올해는 260억원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오는 5~6월쯤 장애예술 진흥과 관련한 기본계획을 발표하고 9~10월쯤 충정로에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위탁운영하는 장애예술 전용극장도 개관할 예정이다. 한국의 장애예술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