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길을 비춰줄 청사초롱을 손에 들었다. 달빛 아래 고즈넉한 고궁을 거닐자 점차 시끄러운 도심과 멀어졌다.
19일 사전행사로 엿본 ‘창덕궁 달빛기행’은 100여분간 역사 속 궁궐로 떠나는 시간여행이었다. 밤에 만나는 고궁은 낮과 다른 특별한 매력을 드러냈다. 외부의 빛과 소음에서 차단된 밤의 적막함 속에 궁궐은 낮보다 더 아늑하고 포근했다. 하늘로 뻗어있는 처마의 아름다운 곡선이 조명으로 빛났고 은은한 달빛이 공간의 실루엣을 드러냈다. 4월의 선선한 밤바람을 타고 녹음의 싱그러운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600년 역사의 돌다리 금천교를 건너 본격적으로 고궁 탐방을 시작했다. 임금이 다니던 길인 어도를 따라 들어가 창덕궁의 유일한 국보 인정전을 만났다. 즉위식이나 태자 책봉식 같은 주요 행사가 이뤄지던 곳이다. 인정전 마당인 조정에는 문무대관들의 품계석이 줄지어 서 있다. 인정전 기단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도심 빌딩이 담장 너머로 보였다.
인정전을 지나 만난 희정당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거처하던 곳이다. 최근 전등과 전기시설 정비를 마치고 이번에 처음 야간 개장을 했다. 1920년대 서양식 조명과 화려한 샹들리에를 볼 수 있다. 희정당 옆에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던 낙선재가 있다. 고종 황제의 딸 덕혜옹주가 1989년까지 머물던 곳이다. 창호지 너머로 새 나오는 불빛이 고택의 정취를 전했다. 창문마다 창살 무늬가 각기 달라 더 아름답다. 낙선재 위쪽에 자리 잡은 상량전은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곳이라 임금이 자주 찾았다고 한다. 이곳에선 아름다운 대금 연주 소리가 방문객을 반겼다. 상량전은 평소 개방하지 않고 달빛기행 때만 공개한다.
왕실 가족이 밤의 산책을 즐긴 후원은 창덕궁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소다. 후원의 꽃인 연못 부용지에는 처마가 사방으로 뻗어 연꽃을 닮은 부용정이 있다. 부용지 가운데 네모난 섬이 있는데, 연못은 하늘, 섬은 땅을 의미한다. 건너편에는 규장각이 달빛을 받아 아름답게 서 있었다. 부용지 앞에 서서 달빛 아래 사색하는 왕의 모습이 떠올랐다. 달빛기행 중에는 전문 배우들이 왕과 왕비, 시중을 드는 신하로 분장하고 관람객과 사진 촬영을 하는 ‘왕가의 산책’ 이벤트가 진행된다.
영조가 직접 현판을 쓴 영화당에선 전문 연주자가 켜는 거문고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숙종의 연꽃 사랑을 담은 애련정에선 구성진 가곡이 밤의 적막을 뚫고 나왔다. 연경당에선 달빛기행의 백미인 궁중무용 공연이 펼쳐졌다. 이날 사전행사에 외국인으로 초청받은 유실라(44)씨는 “창덕궁은 낮에만 왔었는데 밤에 오니 전통악기의 아름다운 소리와 전통 공연을 볼 수 있어 아주 특별한 경험이 됐다”고 말했다.
봄밤에 고궁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창덕궁 달빛기행 행사는 21일부터 6월 12일까지 매주 목~일요일 하루 4회 진행된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와 한국문화재재단이 진행하는데 회당 관람 인원은 25명, 관람 시간은 100분이다.
최예슬 기자 smar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