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작가가 연필로 그린 전쟁, 한국서 최초 출간

입력 2022-04-21 20:19
올가 그레벤니크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을 그림으로 옮겼다. 방공호가 된 마을 지하실에서 아이들이 분필로 벽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 이야기장수 제공

“전쟁 전날 밤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아이들이 잠든 후 남편과 나는 오랜만에 둘이서 오붓하게 대화할 시간을 가졌다. 늦은 저녁을 먹으며 우리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에게는 천 개의 계획들과 꿈이 있었다.… 그리고 새벽 5시,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처음에는 폭죽 소리인 줄 알았는데, 사방에서 폭격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완전히 파악하지도 못한 채 나는 미친 듯이 서류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의 유명한 여성 일러스트레이터가 전쟁 직후부터 폴란드로 탈출하기까지 17일간 쓴 그림일기가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출판됐다. 작가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그림들을 보고 한국 출판사 이야기장수 측에서 연락을 해 책으로 만들었다. 작가는 노트에 연필로 그린 일기를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어 출판사에 보냈다.

‘전쟁일기’의 작가 올가 그레벤니크(36)는 어린이책 일러스트를 그려왔다. 그의 그림은 환상적인 그림체와 아름다운 색감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그의 삽화가 들어간 그림책은 세계 각국에서 성공적으로 출판됐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아이의 팔에 이름, 생년월일, 전화번호를 적어 둔 모습. 이야기장수 제공

그에겐 아홉 살 아들과 네 살 딸이 있다. 그의 가족이 사는 하리코프(하르키우)는 우크라이나 제2의 도시로 전쟁 초기부터 집중 공습을 받은 곳이다. 러시아와 인접한 동부에 있다. 2022년 2월 24일 새벽 폭격과 함께 전쟁이 시작됐다. 이때부터 올가 가족은 아파트 지하에 있는 대피소에서 지냈다. “전쟁 첫째 날 내 아이들의 팔에 이름, 생년월일, 그리고 내 전화번호를 적어두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내 팔에도 적었다. 혹시나 사망 후 식별을 위해서.”

조용할 때면 집으로 갔다가 폭격 소리가 들리면 바로 지하로 뛰어가는 생활이다. 시내가 폭격당하고, 옆집에 미사일이 떨어진다. 공습이 끝날 때까지 잠자리에 들 수 없다. “모든 하리코프 시민들은 지하실에 처박혀 그들이 우리의 도시를 무너뜨리는 광경을 핸드폰으로 지켜보고 있다.”

주민들은 식료품을 구할 수 없고 은행에서 현금을 뽑을 수도 없다. “우리에게는 빵 반 덩어리가 남았다.… 음식은 가루 한 톨까지 다 먹어치운다.” 아이들은 지하실에서 체스를 두고 분필로 벽에 그림을 그리며 논다.

작가는 지하실에서 여덟 밤을 보내고 하리코프를 떠난다. 그는 당시의 결정에 대해 “나는 아이들을 위해 도망쳤다”고 설명했다. 어렵게 택시를 구해 기차역으로 가서 빈 기차에 올라탔다. 리보프(르비우)로 가는 기차였다. “열차는 이 세상의 모든 눈물로 가득하다. 여자들과 아이들. 기차가 멈출 때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더 많아졌다. 아이들은 울고 있다. 엄마는 눈물을 삼키며 아이를 달랜다. 아빠는 다음 기차로 따라올 거라고.”


그러나 아빠는 오지 못 한다. 우크라이나에 내려진 계엄령으로 남편들은 나라를 떠날 수 없다. 작가도 남편을 남겨둔 채 두 아이를 데리고 폴란드 바르샤바로 향했다. “남편은 우리를 버스에 태웠다. 그는 더이상 우리와 함께 갈 수 없다. 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고, 남편은 온 힘을 다해 우리를 격려해주었다. 세료자(딸)는 ‘러브 이즈’(Love is) 껌을 손에 쥐여주었고, 다음에 다시 만날 때 껌을 같이 까먹자고 서로에게 약속했다.”

일기는 바르샤바에서 불가리아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장면으로 끝난다. “나는 이미 선택했고, 이젠 그 선택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엉엉 울고 싶었지만, 바로 곁에 내 아이들이 있었다.” 그는 현재 불가리아에 임시 난민 자격으로 머물고 있다.

작가는 피난과 탈출 속에서도 연필로 상황을 그렸다. 정교한 그림은 아니지만 뉴스 영상에선 볼 수 없는 전쟁 속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실제 현실을 보여준다. 그는 지하실의 모습을 주로 그렸다. 어둠을 틈타 지하실을 나와 집으로 올라가는 모습, 지하실의 임신부들과 고령자들, 그리고 아이들. 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장면이 많다. 지하실에서 친구가 되는 아이들, 분필로 벽에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 애착 인형을 꼭 안고 있는 소녀, 가냘픈 팔에 적힌 이름과 전화번호….

작가는 전쟁 속에 고통받는 평범한 사람들을, 눈물 흘리며 헤어지는 가족을, 지하실의 애잔한 아이들을, 한 재능 넘치는 예술가의 절망을 전해줄 뿐이다. 여기에는 정치도 없고 죽음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전쟁의 스펙터클이 보여주지 않는, 진짜 전쟁의 얼굴이다. 이 글을 번역한 러시아문화 전문가 정소은씨는 “이것은 수백만 평범한 우크라이나 여성들의 이야기”라고 했다.


올가(사진)는 한국에서 자신의 ‘전쟁일기’가 출간된다는 소식을 SNS에 올리고 “간단한 연필과 공책밖에 없었지만 여전히 말을 할 수 있었다”면서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자 도움을 청하는 나의 외침”이라고 밝혔다. 출판사에 따르면, 한국판 출간 이후 많은 나라에서 판권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유럽 출판사들도 작가를 접촉해 책을 출간할 예정이다. 전쟁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한 젊은 작가가 연필 그림으로 발신한 이야기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세계에 알리는 평화의 무기가 되고 있다.

불가리아의 소도시에서 지내는 올가는 ‘작가의 말’에서 “매일 밤 난 꿈에서 남편과 내 고향 도시를 본다”고 말했다. “잠에서 깨어나면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다. 핸드폰을 들어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어떻게 지내?’” ‘그림일기’의 출간은 우크라이나 시민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와도 같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이 책의 인세는 바로 작가에게 전달되며, 번역료 전액과 출판사 수익 일부는 저자가 추천한 우크라이나 적십자에 기부한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