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에 만들어진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소설가를 꿈꾸는 한 인물은 어느 날 밤 프랑스 파리 거리를 걷던 중 자기가 ‘황금시대’라고 생각하는 1920년대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피츠제럴드 부부와 헤밍웨이,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등 당시 파리에서 활동했던 예술가들을 만나며 행복해한다. 소설 창작에 대한 조언을 받기도 하고 피카소의 연인으로 설정된 한 매력적인 여인과 사랑을 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1920년대 사람인 아드리아나는 그보다 앞선 시대인 1890년, 이른바 ‘벨 에포크(좋은 시대)’를 황금시대라고 생각하며 동경한다는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1890년의 사람들은 르네상스 시대를 동경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시대에 만족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가장 좋은 시대라고 생각하는 시대는 먼 과거에 있다. 혹은 미래에. 겪어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살아내야 하는 구체적 현실이 아니라는 점에서 먼 과거와 미래는 같다.
“모든 뒷사람들은 자기 앞사람을 미워한다.” 이 문장은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소설 ‘민들레’에 나온다. 어떤 이유인가로 감방에 갇힌 인물은 하루에 한 번 30분씩 허용된 운동 시간에 다른 죄수들과 함께 운동장을 스무 바퀴씩 돈다. 30분에 스무 바퀴를 돌았다고 하니 운동장은 아마 넓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죄수들은 자기 앞사람의 뒤를 보며 걷지 않을 수 없는데 미움은 거기서 생겨난다고 보르헤르트는 말한다. “모든 뒷사람들은 자기 앞사람의 다리를 본다. 그리고 앞사람의 걷는 리듬은 그것이 아무리 낯설고 불쾌하더라도 그들을 강요하고 따라 하도록 만든다.” 그는 앞사람들이 한 번쯤 자기 뒷사람을 돌아보고 서로 소통한다면 어쩌면 모든 게 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보르헤르트는 조그만 원을 그리며 걸어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누군가의 앞사람이며 뒷사람인데도 그런 자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앞사람은 뒷사람을 부정하고 뒷사람은 앞사람을 미워할 뿐이다.
이럴 때 무슨 일이 생기게 되는지를 2022년 봄 대한민국에서 들리는 요란한 파열음들이 알려준다. 우리나라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유난히 앞 정권과 자기들을 차별화하고 앞 시대와 단절하는 예가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가 없지 않았겠으나 그러한 역사가 되풀이되면서 당연하게 여기게 된 면도 있는 것 같다. 앞사람으로서 뒷사람을 부정하고 뒷사람으로서 앞사람을 미워하기만 하는 관성에 휩쓸려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더구나 이번에는 0.73%의 승부로 권력의 주체가 바뀌어서 신구 권력 간 갈등이 두드러져 보인다. 부정과 미움의 관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엄청난 차이로 졌든 아깝게 졌든 졌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10대 0이든 1대 0이든 승과 패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 조언은 진 쪽을 향한 것이지 이긴 쪽을 향한 것이 아니다. 간발의 차로 이긴 쪽은 자기들의 승리가 질 수도 있었던 승리였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10대 0 대승과 승부차기 신승은 같은 승이 아니다. 승자와 패자의 마음이 이럴 때 부정과 미움의 관성에서 벗어나 소통의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의 글판에는 김사인 시인의 시 ‘공부’의 일부가 걸렸다.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만해집니다.” 이 구절의 앞 행은 ‘갈잎 지고 새움 돋듯’이다.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이 갈잎 지고 새움 돋는 것과 같은 자연의 이치라는 것이다. 지고 돋고 가고 오고 죽고 태어나고…. 그런 자연의 큰 운동을 닮아 기꺼이 보내고 맞고 해야 한다는 뜻으로 나는 이 구절을 읽었다. 요컨대 이런 전환이 필요하다.
보르헤르트 소설에서 앞사람의 다리만 보고 걸으며 미워하기만 하던 그 인물의 마음은 그 좁은 운동장 한편에 피어 있는 아주 작은 노란 민들레를 발견하면서 달라진다. 그 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느끼고, 그 꽃에 이름을 지어 주고 입을 맞추고 안고 잔다. 그 꽃으로 인해 짓누르던 모든 것들을 떨쳐버렸다고 작가는 쓴다. 앞사람에 대한 미움도 뒷사람에 대한 부정도 아마 떨쳐버렸을 것이다. 이 소설의 끝부분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그에게서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이승우 조선대 교수·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