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자신이 경험해 체득한 것을 옳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체험해 봐서 아는데 당신은 잘못됐어’라는 식의 판단을 자주 합니다. 소위 ‘라떼는(나때는) 말이야~’라는 식의 논리 전개입니다. 하지만 신앙에 관한 한 이런 식의 개인 경험은 심각할 정도로 신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지식과 체험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 주는 자리가 성금요일 십자가 사건입니다.
한번 떠올려봅시다. 그날 골고다 언덕엔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있었고 그 앞엔 많은 군중이 모여 있습니다. 그중엔 분명히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껏 예수가 베풀어준 기적과 신비라는 놀라운 경험을 통해 ‘예수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믿고 있던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자 충격과 절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그 비참한 광경을 목격하면서 한 사람씩 경험에 기대왔던 신앙을 절망과 맞바꾸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한 사람씩 십자가 주위를 떠납니다.
그중엔 소위 ‘진짜 신앙 좋은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그들은 무언가 반전이 생기길 기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천사가 나타나 십자가를 부수고 아들을 구해낼 것’을 간절히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도록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마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탄식 끝에 힘없이 숨을 거둡니다. 모든 것이 그렇게 끝나버립니다.
골고다 십자가 주위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그런 장소가 돼 버립니다. 그런 증거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습니다. 골고다에 있던 사람들의 결론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없다’라고 말입니다. 신앙인이건 비신앙인이건 모두 동일하게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없다.’
하지만 사흘 후 그리스도는 부활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은 없다’라던 우리의 경험 판단을 완전히 뒤엎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죽음의 자리에서도 함께 계셨고 일하고 계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온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롭게 게시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일하심은 우리의 체험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논리와 체험으로만 따지면 하나님은 골고다 언덕에 계시지 않습니다. 고난이 시작되면 우리 신앙은 발가벗겨지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렇게 고통당하는데 어떻게 그 고통 가운데 하나님이 계실 수 있다는 것인지 의심하게 됩니다. 이와 똑같은 생각이 십자가 주위에 모였던 사람들의 머릿속을 꿰뚫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은 그 상황을 바꾸었고 나아가 경험과 체험에 의존하던 신앙 양식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복시켜 버립니다.
이렇듯 십자가 신앙이란 내 경험과 지식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지식이나 경험을 자랑할 일도 아닙니다. 십자가에 비추어 보면 내 경험과 지식은 보잘것없는 것이 돼 버립니다. 심지어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 지식, 모습’조차 하나님의 얼굴이 아닌 하나님의 등(posteria)이라는 사실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등’일 뿐입니다. 그러니 잘난 체하며 자기 체험을 자랑하거나 타자의 하나님(상)을 무시하고 경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더불어 요즘 세상 사는 게 아무리 힘들고 팍팍해도 하나님이 우리 곁에서 도우신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모두 힘냅시다. 부활의 주님이 우리 모두를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최주훈 목사(중앙루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