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안상수 국민의힘 인천공동총괄선대위원장(현재 인천시장 예비후보)이 각종 논란에 휩싸인 김건희씨를 변호하는 도중 페이스북에 “좌파 예술계를 척결해야 한다”는 취지로 언급해 파문을 일으켰다. 자기편을 보호하기 위해 상대방을 물어뜯는 게 다반사인 선거 과정에서 나왔다고는 해도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를 경험한 문화예술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망언이었다.
당연히 문화예술계에서 안 위원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국민의힘이 정권을 잡으면 블랙리스트를 부활시키겠다는 의도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 위원장 발언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던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문화예술계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
여기에 문화예술계를 분노하게 만든 사건이 최근 발생했다. 유진룡·박양우 전 장관 등 문화체육관광부 고위 관료 12명이 블랙리스트 핵심 실무자인 김낙중 국립중앙박물관 행정운영단장과 용호성 사행성통합감독위원회 사무처장에 대한 문체부의 징계 절차에 ‘재고’ 청원을 낸 것이다. 두 국장이 지난 4년여 동안 충분한 불이익을 받았고, 검찰 조사 결과 불기소 처분을 받은 만큼 징계를 멈춰 달라는 내용이다. 앞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 등 ‘어공’(어쩌다 공무원)은 블랙리스트 관련 처벌을 받았지만 ‘늘공’(직업 공무원)인 문체부 공무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문체부는 2018년 두 국장이 박근혜 정권 시절 청와대에서 근무하며 블랙리스트 관련 문화예술계 배제 인사 명단을 문체부에 전달한 문제 등으로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당시 도종환 장관은 관료들이 불기소 처분을 받더라도 자체 징계를 하겠다고 국민 앞에 약속했다. 대선 직후인 지난달 10일 검찰의 불기소 처분 이후 황희 장관이 징계 절차를 밟기 시작하자 전직 문체부 고위 관료들이 ‘제 식구 감싸기’로 징계의 정당성을 흔드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에 앞장섰던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 문화연대 등을 중심으로 문화예술계의 항의가 이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전직 문체부 고위 관료들이 두 국장의 블랙리스트 연루 자체를 부인하는 듯한 모습에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고위 관료야말로 자신의 부하들에게 블랙리스트 관련 명령이 하달되는 사실을 알고 묵인했던 당사자들이기도 하다.
문체부는 블랙리스트 파문 이후 줄곧 자신들 역시 청와대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태도를 취해 왔다. 블랙리스트 존재를 처음 인정했던 유진룡 전 장관이 이런 논리를 강하게 펼쳤지만 문화예술계는 납득하지 못한다. 블랙리스트 문제는 기본적으로 문체부가 문화예술계를 장악하고 통제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실례로 공적 지원을 받는 국공립 문화예술기관의 경우 대부분 문체부가 대표와 국장을 임명하고 있으며 이사진까지 좌지우지한다. 그래서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 위원회가 산하기관에 문체부 퇴직 공무원 임명 관행 개선 의견을 내놓았지만 전혀 바뀌지 않았다.
박근혜 정권 시절 ‘국정농단’ 의혹 수사팀장이었던 윤석열 당선인은 블랙리스트 관련 입장을 밝히라는 문화예술계의 요구에 묵묵부답이다. 다만 박보균 문체부 장관 후보자가 “블랙리스트라는 단어 자체가 악몽처럼 과거에 존재했다. 윤석열정부에서는 블랙리스트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블랙리스트 원죄가 있는 만큼 국민의힘은 과거의 범죄에 책임 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블랙리스트를 원칙적으로 막기 위해 문체부의 관료주의와 과잉 권력화를 타파하는 개혁에 나서야 한다.
장지영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