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도시로 몰려든 피란민, 이농민 상당수가 서울 마포구 아현동 언덕배기에 터를 잡았다. 말이 주거 지역이지 무허가촌이 대다수였다. 언덕마다 좁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전형적인 달동네, 산동네였다. 이런 모습은 1990년대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것은 이 일대가 2000년대 뉴타운사업지구로 지정되면서부터다. 4000가구 가까운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한 아현동 일대는 ‘마용성’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거지가 됐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아현동에서 대각선 맞은편에 자리한 곳이 종로구 창신동이다. 창신동은 조선시대 때 나름 번성했던 곳이다. 한양도성으로 들어오는 흥인지문과 가까워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낙산 일대엔 양반들 가택, 정자가 들어섰다. 그런데 전쟁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이주민이 속속 유입되면서 가파른 산비탈까지 무허가 주택이 줄줄이 들어섰다. 말 그대로 도시빈민의 마을이 된 것인데 그 모습은 지금도 그대로다.
요즘 창신동 골목길을 가본 사람들은 서울 도심 가까이에 아직도 이런 곳이 있다는 데 놀란다. 어둡고 좁은 골목길, 높다란 계단, 낡은 주택, 곳곳에 금이 간 담벼락. 장마철엔 하수구 냄새가 나고 골목길엔 차량이 못 들어가 오토바이가 다닌다. 한 건물에서 불이 났는데, 길이 좁아 소방차가 들어가지 못한 적도 있다.
서울에서 노후주택 비율이 가장 높은 곳 중 하나인 창신동은 도시재생 1호 지역이다. 과거 아현동처럼 뉴타운으로 지정됐지만 박원순 서울시장 시절 해제됐고, 도시재생의 대상이 됐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도시재생 명목으로 몇 년간 1000억원 안팎의 예산이 투입됐는데 정작 주민들 목소리는 배제됐다. 주민들은 “도로를 넓혀 달라” “집수리를 해 달라” “어두운 골목에 가로등을 설치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들어선 건 주민 생활과 관련 없는 봉제역사관, 백남준기념관, 채석장 전망대, 산마루놀이터였다.
도시재생이 뜬구름 잡는 식이 되자 주민들은 공공재개발을 요구했지만 배제됐다. 도시재생사업 지역은 배제한다는 방침 탓이었다. 거액을 들여 도시재생을 했는데 공공재개발로 유턴할 경우 정책 실패를 인정하는 꼴이라는 인식도 작용했을 듯하다. 시간이 흘러 주민들은 “사기당했다” “담벼락에 그림만 그려놓았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창신동은 뭐가 문제였을까. 전문가들은 창신동의 도시재생이 앞뒤가 바뀌었다고 지적한다. 도시재생을 위해선 주택 수리, 도로 확장 등 열악한 주거환경부터 손봐야 하는데, 지역공동체 활성화를 가장 먼저 추진한 게 패착이었다. 주민 목소리를 외면한 보여주기식 행정에 애꿎은 주민들만 고생한 셈이 됐다.
오세훈 시장 취임 후 서울시는 도시재생 지역에서도 재개발사업 추진이 가능한 도시재생 재구조화를 발표했다. 이어 신속통합기획 재개발사업 후보지 21곳에 창신동도 포함됐다. 도시재생이든 재개발이든 모두 주민 동의가 전제돼야 하고, 젠트리피케이션 역시 최소화해야 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노후 지역이라 무조건 갈아엎어야 한다거나 아니면 보존만이 최고의 선이란 인식은 이제 위험하다. 굳이 어느 한쪽만 선택할 필요도 없다.
서울시내 곳곳은 수십년이 흐르면서 상전벽해가 됐다. 개발 열풍에도 계속 소외돼 왔던 창신동이 이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오 시장은 얼마 전 창신·숭인 지역을 방문해 “열악한 주거 환경 개선은 서울시 책무”라고 했다. 주민들에겐 “무엇이 바람직한 길인지 계속 논의를 모아가겠다”고 했다.
일단 주민들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자. 우문현답.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 ‘오세훈표 창신동’은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궁금하다.
남혁상 사회2부장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