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비교적 늦은 나이에 기자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름 뒤에 붙는 기자라는 호칭이 낯설기만 합니다.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기자’라는 직함을 줬기에 기자는 기자입니다만, 아직은 진짜 기자라기보다는 ‘기자가 돼 가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개신교 신앙의 핵심인 ‘구원’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먼저 개신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진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았다는 성경 내용을 기반으로 합니다. 여기에 더해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교리도 개신교의 핵심입니다. 신학적으로 깊게 파고들면 심오한 용어지만, 간단히 말하면 죄인인 인간이 앞서 말한 성경 속 ‘구원’을 온전히 믿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 칭하셔서 구원받게 된다는 걸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구원의 핵심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한때 ‘구원’을 최종 목적지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삶 속에서 성경을 정독하고, 열심히 봉사하며 하나님 뜻을 알아가야 비로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논리는 이단·사이비 종교 단체가 신도들을 구속하는 논리로도 사용됩니다. 이들 단체는 신도들에게 과도한 헌금과 헌신을 요구합니다. 시한부 종말론을 펼치며 지금 당장 교주 혹은 그들이 말하는 ‘교회’에 헌신하고 헌금하며 마음을 보이지 않으면 헛된 인생을 사는 것이면서 당장에라도 지옥에 떨어질 것처럼 미혹합니다. 이는 이단 신도들뿐 아니라 일반 정통교회 성도들도 가진 오해가 아닐까 합니다. 마치 헌금이나 봉사로 하나님께 마음을 보이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할 것 같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에 헌금과 봉사에 부담을 갖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핵심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목적전치(目的轉置) 현상’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목적보다 수단이 중요시되면서 수단 자체가 목적이 돼 버리는 현상을 일컫습니다. 의사가 되기 위해선 공부를 많이 해야지, 자질도 없는 사람이 그저 공부를 많이 했다는 이유만으로 의사가 된다면 의사 자신에게도 환자에게도 득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봉사에 힘쓰고 헌금도 하는 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하기 때문이지, 봉사와 헌금만 무조건 많이 한다고 해서 복을 더 얻고, 더 큰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란 얘기입니다. 혹자는 이를 “하나님의 은혜를 값싸게 취급하는 것”이라고까지 강하게 말하기도 합니다.
구원을 받는 데 필요한 건 우리의 ‘믿음’뿐이지 헌금이나 봉사 정도가 아닙니다. 믿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통로입니다. 헌금을 드리는 것은 우리의 재정을 채워주시며 먹이시고 살리시는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감사의 표현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얻는 건 복과 구원이 아닌, 신앙의 성숙해짐과 그로 인한 열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일에 힘쓰라고 하신 건 이를 통해 우리가 그에게 믿음을 보임으로써 자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시려는 뜻입니다. 우린 그저 생명까지도 다 주시겠다고 하시며 또 이미 다 주신 하나님 앞에 믿음을 보이기만 하면 됩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종교와 복음의 차이는 ‘마일리지’에 있다”고 말입니다. 마치 마일리지 쌓듯 두려움으로 인해 무언가를 바치며, 노력을 기울인들 하나님의 마음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요. 인간 노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린 하나님께서 대가 없이 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큰 사랑의 표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단 종교에 빠진 이들도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들 대부분 교회에서 느끼지 못한 성도 간 사랑을 이단 신도에게서 느꼈기에, 또 더 열심히 하나님을 믿어보려다 미혹된 건 아닐까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단”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사랑은 구원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세상과 이단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