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비리길. 경남 창녕군 남지읍 마분산(馬墳山) 기슭 낙동강 변을 따라 이어진 아슬아슬한 벼랑길이다. 용산 마을에서 신전리 영아지 마을까지 이어지는 2.7㎞ 구간이다. 800리 낙동강 유역 중 경관이 빼어나기로 손에 꼽히는 옛길로, 조선시대 고지도와 일제강점기 지형도에도 옛길의 경로가 기록돼 있다. 지난해 국가 명승으로 지정됐다.
개비리는 ‘개가 다닌 절벽(비리)’ 또는 ‘강가(개) 절벽(비리)에 난 길’이라는 뜻을 지녔다. 첫 번째 뜻에는 강아지의 모정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옛날 영아지 마을에 사는 황씨 할아버지의 개 누렁이가 새끼 11마리를 낳았는데 그중 한 마리가 ‘조리쟁이’(못나고 작아 볼품이 없다는 뜻의 사투리)였다. 힘이 약했던 조리쟁이는 어미젖이 10개밖에 되지 않아 젖먹이 경쟁에서 항상 밀렸다. 황씨 할아버지는 그런 조리쟁이를 가엾게 여겨 10마리는 시장에 내다 팔았지만 조리쟁이는 집에 남겨 뒀다.
어느 날 산 너머 시집간 황씨 할아버지의 딸이 친정을 다녀가면서 조리쟁이를 데려갔다. 며칠 후 딸은 친정의 누렁이가 산을 넘어와 조리쟁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폭설이 내린 날에도 찾아오는 것을 보고 궁금하게 여긴 사람들이 뒤를 밟았더니 누렁이는 눈이 쌓이지 않는 가파른 벼랑길을 이용하고 있었다. 이후 사람들과 나무꾼, 장사꾼들이 이 벼랑길을 걸었다.
개비리길의 시작은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용산마을이다. ‘강이 갈라진다’는 뜻인 기음강(岐音江) 기강(岐江)이라 불리기도 한다. 기음강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과 의병이 북상하는 왜선을 격퇴해 첫 승을 거둔 곳이다.
마을을 떠나 ‘홍의장군 곽재우의 붉은 돌 신발’을 지나면 ‘옥관자 바위’가 세워져 있다. 곽재우 장군은 자신의 말에 벌통을 매달아 몰려오는 적진에 뛰어들게 했다. 벌떼의 공격을 받아 대열이 흐트러진 왜군을 기습해 대승을 거뒀다. 이 과정에서 적탄에 맞아 숨진 말을 안타깝게 여긴 곽재우 장군은 토성 안 의병무덤 뒤에 말 무덤을 만들어줬다. 마분산의 유래다.
이후 강을 따라 구불구불 벼랑을 더듬으며 나간다. 강물이 절벽을 안고 돌면 같이 돌고 휘어져 들어오면 깊숙이 함께 물러난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이 길은 아찔한 절벽 위를 지나며 낙동강이 그려주는 눈부신 풍경을 가슴에 가득 안겨 준다.
하늘을 찌를 듯한 대숲도 만난다. 죽림쉼터다. 주변에 여양 진씨의 회락재 유허지와 100년의 나이테가 켜켜이 쌓여있는 영험 있는 팽나무 이야기, 여양 진씨 가문의 ‘감나무 시집보내기’, 꼼지락 돌탑 등의 이야깃거리가 있어 개비리길 탐방객들에게 인기 있는 곳이다. 낙동강 변에 자리한 정자에 앉아 바람에 사각거리는 대나무소리를 들으며 강물이 굽이져 돌아나가는 모습을 보면 마음마저 평화로워진다.
강을 따라 북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6·25전쟁 때 낙동강전투 최후 방어선이었던 박진나루터가 있다. 미군 제2사단과 제24사단이 인민군 정예부대인 제4사단과 2주간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해 낙동강을 건너 반격에 나섰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한다.
창녕=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