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디스 미국 백악관 국가경제회의(NEC) 위원장은 “제재 충격이 러시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인내심과 장기적 관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러 제재 설계자의 ‘인내’ 발언은 전쟁 6주째가 되던 지난 6일(현지시간) 나왔다. 제재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꺾지 못했다는 비판에 대한 항변이었다. 그는 이 말을 할 때 ‘생션 레짐’(sanctions regime·제재 체제)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대러 제재가 국제적 질서가 된다는 말이다. 제재는 유지되고 있지만 전쟁은 8주 차를 향해가고 있다.
생션 레짐에는 이번 사태를 기화로 러시아를, 직접적으로는 푸틴을 어떻게든 손봐야겠다는 의도도 깔려 있다. 전쟁 상황이나 결과와 무관하게 지금의 러시아를 가만둬선 안 된다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이 사태 장기화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속내도 읽힌다. 워싱턴포스트는 ‘러시아를 고립시키려는 미국의 장기 전략 가시화’라고 표현했다. 장기적 관점의 러시아 봉쇄는 유럽을 동맹으로 묶어 두려는 미국의 전략적 이익과도 맞아떨어진다.
손발이 묶인 채 사살당한 민간인, 어린이를 포함한 강간 범죄, 부모를 죽여 놓고 아이를 데려가 프로파간다 도구로 활용하는 소시오패스적 행태…. 러시아가 지나간 자리에서 드러난 참혹한 모습은 이런 조치의 당위성을 높이고 있다. 전쟁 초반 생션 레짐에 발을 들여놓을지 말지를 고민하던 여러 국가는 러시아의 잔혹성이 던진 도덕적 질문 앞에서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다른 한편에선 영웅주의가 판친다. 여러 정치인이 전투기 등을 지원하고, 우크라이나 주변에 군대를 보내라고 한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약해 보여 푸틴이 날뛴다는 비판도 따라온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대체로 미국 참전은 안 된다거나, 핵전쟁이 될 세계 3차대전은 막아야 한다는 전제를 슬그머니 빼놓는 경우가 많아 공허하게 느껴진다. 반전 철학자 놈 촘스키는 지난 14일 커런트어페어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지적하며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영웅적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영웅적 발언은 러시아 만행에 대한 공분과 강력한 대응 촉구 여론이 높아지면서 계속 힘을 얻고 있다.
도덕적 분노에 기댄 강경파들은 우크라이나 희생을 묵과하게 만들고 있다. 돈바스 전면전이 본격 시작되면서 전장에는 긴장감이 넘치는데, 예고된 참사를 막는 시도는 사라졌다. 바이든은 전쟁 시작 이후 단 한 차례도 외교적 해결 가능성을 언급한 적이 없다. 최근에는 ‘도살자’ ‘전범’ ‘축출’ ‘제노사이드’ 등의 말을 하며 한 줌의 기대조차 없애버렸다. 유권자 대다수가 러시아를 적으로 보는 나라에서 선거를 앞둔 정치인이 타협을 입에 올리는 것은 정치적 자살행위 취급을 받는다. 이런 일들이 합력하면서 우크라이나 사태는 이제 한쪽이 무너지는 극단의 결과만을 향해 치닫고 있는 듯하다. 촘스키는 핵전쟁만은 막자며 굴욕적이더라도 우크라이나가 양보해야 한다는 제안을 했는데, 미국 정치권에선 아무런 반향이 없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렇게 세계를 새로운 시대로 옮겨 놨다. ‘세계화의 종말’ ‘신(新)냉전’처럼 신세계 얼개를 그리는 단어는 대결적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고립주의는 바이든 행정부의 ‘깐부동맹’으로 진화했고, 우크라이나 사태는 그 강도를 더했다. 이 역시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부합한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며칠 전 새 시대 교역 형태에 관해 ‘프렌드 쇼어링’을 언급하며 “앞으로 경제 문제를 국가안보 등 광범위한 국익 고려와 분리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정학적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이 마주해야 할 신세계다.
전웅빈 워싱턴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