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잔디밭에 들어가시오

입력 2022-04-20 04:05

손흥민 선수의 호쾌한 무릎 슬라이딩 세리머니를 볼 때마다 잔디와 맞닿는 그 감촉을 상상한다. 어떤 다른 공간과 물질이 그 여린 신체의 거친 동작을 받아줄 수 있을까. 기억해보면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가 일상이었고, 선을 넘으면 경비 아저씨가 호각을 불며 쫓아왔다. 늘 맨땅에서 뛰놀다 넘어져 무르팍 까지며 철이 들었지, 잔디를 한껏 밟아본 기억이 없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은 이상향이고, 현실은 비탈진 시멘트 동네와 후미진 뒷동산이었다. “잔디는 하루 2~3회 밟아줘야 더 잘 자란다”는 지도교수님 강의를 듣고 얼마나 경악했는지. 늘 금지당해 왔기에 기성세대들이 마음껏 잔디를 즐기는 골프에 더 열광하는 건 아닐까.

잔디밭에 대한 금기가 풀린 것은 2002년 월드컵 열기를 타고 2004년 서울광장이 오픈하면서다. 시청 앞 X자형 도로를 없애고 1만3000㎡의 광장을 만들 때 중앙 절반을 ‘저 푸른 초원’으로 꾸몄다. 거친 한국잔디가 아니라 국제 규격 축구장이나 골프장 ‘그린’에 쓰는 양탄자 같은 서양잔디(켄터키 블루그래스)였다. 부드럽고 탄탄하고 시원한 그 잔디밭에 퇴근 무렵 노을이 깔리면 그림처럼 앉아 담소하는 직장인들 주변에 앉곤 했다. 엔데믹을 기다리는 또 하나의 이유다.

회사 앞 양천공원에는 누구나 뛰놀 수 있는 4000㎡ 잔디광장이 있다. 공원 리노베이션 과정에서 기존 아스팔트 바닥을 잔디로 바꾼 것. 누구나 좋아할 것 같지만 우여곡절이 컸다. 잔디가 죽는다, 행사하기 불편하다, 관리비가 많이 든다 등. 상상이 현실이 되자 변화가 소용돌이쳤다. 누구나 즐기는 ‘저 푸른 초원’이 된 것이다. 작년 내내 공놀이에 배드민턴에 뜀박질에 심지어 선탠까지. 공원 인기의 척도인 노점상도 종종 출몰한다. 새봄 잔디 새순이 나오는 시기라 한 달간 막았다 다시 문을 연다. 잔디밭에 들어가는 건 가장 원초적인 자연과의 접촉이고 연결이다. 공원에 잔디밭을 더 만들고 다 개방해야 하는 이유다.

온수진 양천구 공원녹지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