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기자] 멋진 신세계

입력 2022-04-19 04:07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을 취재한 수첩을 다시 읽어보니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박준영 재심 전문 변호사의 말이 정확히 겹치는 데가 있다. “피해는 권력자가 아닌 힘없는 이들에게 돌아간다.” 대통령 당선인은 모두가 이름을 아는 재벌 총수가 영장심사와 1심 재판에 들인 액수를 거론하며 그렇게 말했다. 재심 전문 인권변호사는 사건 적체에 지쳐가는 이들을 두고 같은 말을 했다.

‘검찰주의자’와 인권변호사의 말이 같아야 할 정치적 이유는 발견되지 않는다. 검찰 권한을 빼앗는 일이라는데 정작 그게 검찰의 고통이려나 의문도 든다. 대다수 검사는 법이 시행되면 일찍 퇴근하게 된다. 경찰 기록으로 이런저런 결정을 하면 되는데 ‘지게꾼 검사’ ‘미제 수백건’ 따위의 말은 금세 옛말이 될 터다. 기록에 묻혀 살던 수사지휘 전담검사들은 “수사권·지휘권이라 하지만 애초 권리가 아닌 의무였다”고 말했었다. 지금 검찰엔 그 보직이 없다.

변화에 관심 가져야 할 이들은 따로 있다. 윤 당선인은 대형 경제범죄를 사회에 스며드는 암에 비유했다. 증상을 느끼면 이미 늦었다는 얘긴데, 과연 검사가 사라져서 중병 치료가 수월해진다는 것인지 입법자들도 얼른 말하지 못한다. 박 변호사는 약자 편이라 믿던 정당의 검수완박 시도를 모순이라 불렀다. “하루가 아쉬운 피해자를 위한 법안이 아니다”는 말을, 그보다 권위 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사람들은 알약으로 안정을 찾고 환경에 저항하지 않는다. 통제관은 “우린 편안하게 일하길 더 좋아한다”고 말한다. 최근 수년간 누군가를 위해 제도 자체가 고쳐지길 거듭했고, 신문기자 일도 한편으론 편안해졌다. 다만 알약이 해로운지 악법도 법인지 되묻는 데에는 점점 많은 용기가 필요해졌다. 이제 다가올 멋진 신세계에서 검사들은 범죄를 보면 112를 누르고, 사건 관계인은 사건을 떠넘기는 ‘핑퐁 게임’이 끝나기만 빌어야 한다. 멋진 신세계 속 사람들은 끝까지 세상을 유토피아로 알았다. 그래서 그 소설이 디스토피아 문학으로 기록된다.

이경원 사회부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