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 가본 적이 있다. 자금성 태화전 위에 올라가서 보면 오른쪽에는 인민대회당이, 왼쪽에는 역사박물관이 있다. 그리고 정면에 보이는 현대식 빌딩이 ‘모주석기념당’이다.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의 줄이 족히 1㎞는 될 것 같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한 시간 줄 서서 기다린 끝에 입장했다. 넓은 라운지 한가운데에 큰 몸집의 마오쩌둥이 인민복을 입고 오성홍기(旗)에 덮여 크리스털 관에 안치돼 있다.
마오 주석은 중국 공산당을 창설하고 대장정에서 승리함으로 오늘의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사람이다. 중국인에게는 거의 신적 숭배의 대상이다. 1위안부터 100위안까지 6종의 인민폐에는 젊은 시절 마오의 얼굴만 그려져 있을 정도다. 관람객들이 시신 곁을 지나치며 꽃을 바치고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는데 간혹 눈물을 훔치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다른 이들처럼 10위안짜리 꽃을 바치고 묵념을 했다. 왠지 모를 숙연함이 느껴졌다.
마오 주석의 시신을 숭배하는 데서 얻는 이익이 많다. 중국 인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준 건국의 아버지이기에 국민 통합의 출발점이다. 그의 시대는 순수함의 상징으로 미화돼 노인들에게 끊임없는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를 숭배하는 것에는 위험 요소가 없다. 이미 죽어 시신으로 남은 마오 주석이 다시 살아나 피바람을 일으킬 일은 없다. 그의 뒤를 이은 공산당 지도자들은 저마다 ‘역사결의’를 통해 마오쩌둥 시대를 다시 정의하고 평가한다. 그의 후계자들이 정치적 후광효과를 위해 마오를 이용하더라도, 그가 벌떡 일어나 호통치지는 않을 것이다.
빈 무덤을 남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숭배하는 것은 마오쩌둥을 숭배하는 것과 비교할 때 불편하고도 위험한 일이다. 목회자가 매 주일 열심히 설교를 준비해 전하는데, 살아 계신 예수님이 ‘그거 아닌 거 같은데…’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 때로 자기 생각을 예수님 말씀으로 포장하려 하면 ‘내가 눈 뻔히 뜨고 있는데 나를 속여’ 이런 소리가 들린다. 주일 설교를 준비하는 토요일은 피를 말리는 시간이다.
신학자들은 특히 더 조심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신학(神學)’은 신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의된다. ‘신’이 ‘학’의 대상(object)이 되는 것이다. 마치 생물학의 대상이 생물이고 심리학의 대상이 인간의 심리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신학의 경우 이런 정의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살아 있는 예수님을 개구리 해부하듯 압정으로 고정하고 핀셋으로 들춰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신’이 ‘학’의 주체(subject)가 돼야 마땅하다. 살아 계신 예수님이 나와 세상과 역사를 해석하고 나는 그의 발 앞에 앉아 겸손히 그의 뜻을 경청하는 것이 신학이다.
살아 계신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권력자들이 후광효과를 위해 예수님을 들러리 세우는 것은 살아 있는 신을 능멸하는 오만한 행위다. 하나의 사회적 이념을 예수님의 뜻이라고 절대화하는 것 또한 어리석고 무모한 일이다. 복음서를 열어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보라. 신적 지혜의 풍성함과 심오함과 고상함과 단순함과 충만함에 눈이 밝아지고 에너지가 용솟음치지 않던가. 어디 감히 살아 계신 예수님의 말씀을 세속적 욕망과 어리석음과 오류와 편견으로 가득한 일시적 인간사회의 이념과 동일시한단 말인가.
살아 있는 사람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좀 더 근엄한 표현을 쓰자면 살아 계신 예수님은 예기치 못한 기쁨을 끊임없이 주시는 분이다. 빈 무덤 앞에 앉아 슬픔과 절망의 눈물을 흘리는 한 여인에게 홀연히 나타나셨다. 아무도 예상 못 한 반전이다. 살아계신 그분은 오늘도 텅 빈 무덤가에서 혹시 그가 지나신 흔적이라도 볼 수 있을까 서성이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한 영혼을 찾아오신다.
장동민 백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