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이 세상 구할 순 없지만 인간 고통 치유는 돕죠”

입력 2022-04-18 04:06
3년 만에 내한하는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피아니스트인 딸 릴리와 함께 오는 29일 군산예술의전당, 다음 달 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3일 광주문화예술회관에서 리사이틀을 한다. 도이치그라모폰 제공

“클래식 음악이 세상을 구하거나 커다란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특히 폭력을 겪은 끔찍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더 나은 인간성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듭니다.”

3년 만의 내한 콘서트를 앞둔 ‘첼로 거장’ 미샤 마이스키(74)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같은 위기에서 클래식 음악의 역할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마이스키는 2005년부터 호흡을 맞춘 피아니스트인 딸 릴리와 함께 오는 29일 군산예술의전당을 시작으로 다음 달 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3일 광주문화예술회관에서 리사이틀을 펼친다.

“연주자는 무대에서 대중과 만나는 것이 중요하지만 팬데믹으로 그런 기회를 잃어버렸죠. 온라인 콘서트나 실황 중계가 있었지만 대면 공연과 다르니까요. 드디어 사람들 앞에서 연주할 수 있게 돼서 기뻐요.”

마이스키는 1988년 첫 내한공연 이후 이번이 24번째 내한일 정도로 한국에서 인기가 높다. 현재 노르웨이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인 장한나는 그의 애제자다. 유럽에서 지휘자 장한나와 꾸준히 협연하고 있는 그는 국내 언론에 “다음엔 지휘자 장한나와 함께 내한 공연을 하고 싶다”고 전했다.

구소련 시절 라트비아 리가에서 우크라이나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고초를 겪었다. 모스크바음악원에 재학 중이던 1969년 누나가 이스라엘로 이주한 뒤 당국의 감시대상에 올랐고 이듬해 체포돼 강제수용소에서 18개월간 복역했다. 그는 복역 이후 음악원을 마치지 않은 채 소련을 떠나 이스라엘에 정착했다. 이런 과거 때문에 최근 러시아의 침공으로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우크라이나 난민을 돕기 위한 자선 콘서트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그는 국내외 언론과 인터뷰에서 “21세기 유럽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며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파괴하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나라(러시아)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번 전쟁으로 우크라이나인만이 아니라 러시아인도 고통받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달 말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자선 콘서트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모든 무고한 희생자들을 애도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만이 아니라 러시아까지 포함한 ‘양쪽의 희생자’를 애도했다는 이유로 우크라이나 지지자의 비판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그는 최근 전 세계적으로 러시아 예술가들이 무대에서 퇴출되는 것에 대해 우려를 드러냈다.

“전쟁의 폭력성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설 곳이 없는 게 문명화된 사회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모든 러시아인이 러시아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쫓겨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최근 러시아 연주자만이 아니라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같은 러시아 작곡가의 음악이 금지되는 사례도 나오는데, 너무나 어리석고 터무니없으며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의 문화는 매우 다채로우며 많은 사람에게 중요합니다.”

이번 내한공연에서 그는 2019년 발매한 앨범 ‘20세기 클래식’에 실린 곡을 중심으로 연주를 선보일 예정이다. ‘20세기 클래식’은 메시앙, 피아졸라, 브리튼, 바르톡, 프로코피예프 등의 작곡가들이 격변의 시기에 작곡한 작품을 담았다. 이번 콘서트에선 앨범 수록곡 중 브리튼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C장조 Op65와 피아졸라의 ‘르 그랑 탱고’를 연주한다. 두 곡은 모두 모스크바음악원 시절 마이스키의 스승이었던 거장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에게 헌정된 곡이다. 그는 “스승인 로스트로포비치를 통해 브리튼을 직접 만난 적이 있다. 당시 브리튼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스승님이 첼로를 연주하는 걸 들었는데, 정말 감동적이었다”면서 “정확히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브리튼의 음악이 유독 내 마음에 와닿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데뷔 이후 지금까지 40장 이상의 앨범을 발표했고 3번의 독일 레코드상, 프랑스의 그랑프리 뒤 디스크상과 디아파종 도르상 등을 받았다. 미국 그래미상 후보로도 여러 차례 선정됐다. 최근 유튜브나 스포티파이 등의 영향으로 앨범 구매가 급감하고 있지만 그는 CD를 계속 만들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지금까지 몇 장의 음반을 냈는지 세 본 적은 없어요. 그래서 지난해 도이치그라모폰에서 발매한 것만 모은 음반 전집에 44장이 수록됐다고 해서 저도 놀랐습니다. EMI 등 다른 음반사에서 나온 것은 제외한 수치였거든요. 저는 음반의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연주에서 만나지 못한 관객들을 음반으로 만나는 것이니까요. 무대에서 자주 연주되지 않는 레퍼토리를 음반으로 소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CD가 예전처럼 많이 팔리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낼 겁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