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혼자 가는 것보다 함께 가야 멀리 간다

입력 2022-04-18 04:02

얼마 전 오스카 시상식장에서 윌 스미스가 부인을 모욕했다며 진행자 크리스 록의 빰을 때리는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반응이 달랐다. 미국에서는 공적 영역에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스미스의 행동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다. 83%가 스미스의 행동을 폭력이라 비판했다. 합리성과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국식 개인주의 문화로는 공적 영역에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스미스의 행동은 비난 대상이었다. 결국 스미스는 오스카협회에서 탈퇴했다.

반면 우리 사회는 스미스의 행동을 옹호하는 편이 많았다. 온정주의 시각이 우세했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장에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이명박 대통령의 헌화 순서 때 사과하라며 소란을 피워 기소되자 “자기 아버지와 같은 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이 왔을 때 상주가 항의하지 않는다면 고인을 제대로 추모하는 장례냐”며 논란을 잠재웠던 기억이 난다. 한국적 정서가 작동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공적 영역에서도 감정 표현이 자유로운 집단주의 문화에 기인한다.

집단주의 문화는 가족과 타인을 위해 희생도 감수하는 헌신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놀라운 경제 성장 동력이기도 했다. 하지만 고도 성장과 함께 보편화돼야 했던 자유와 권리가 뒤처지면서 억눌렸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요구가 집단 이익으로 표출되고 있다. 각종 사회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 간 갈등과 대립 속에 타인에 대한 배려는 실종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탄핵과 정권교체로 자유민주주의를 경험했다. 그러나 집단주의에 기반을 둔 진영 싸움으로 귀결되면서 자기 진영 주장은 무조건 옹호하고 상대 진영 주장은 무조건 비난하는 편 가르기로 매몰되고 있다. 감정 표현에 자유롭다 보니 정치적 선전 선동에 따라 줄을 서는 거리의 정치가 일상이 됐다. 전 주한 외신기자 협회장 마이클 브린은 “한국인들은 국민의 뜻에 응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요체라고 생각한다”고 회고했다. ‘어떤 쟁점에 대한 대중의 정서가 특정한 임계질량에 이르면 뛰쳐나와 의사결정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이것을 ‘민심’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 갈등과 관련해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조정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민주주의를 배웠어도 역사적 과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자유주의는 신분제 봉건주의를 붕괴시키며 능력에 의해 노동 대가가 자신의 소유로 보장될 수 있는 자본주의로의 전환에 동력이 된다. 소유의 자유는 생산성 증가를 가져왔고, 넘치는 생산물들을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됐다. 시장이 더해진 자본주의 성장은 놀라웠다. 그렇다고 물질적 풍요로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부의 축적에 따른 불평등은 또 다른 형태의 세습사회를 만들어 냈다. 권리 보장을 위해 자유민주주의가 소환된다. 하지만 경제적 빈곤의 세습에 대한 분노가 이성과 합리성에 의한 사회적 연대보다는 집단주의 문화와 어울려 좌파 우파의 선전 선동에 진영이 분화된다.

일반적으로 좌파는 진보로, 우파는 보수로 발전되면서 사회 속에 함께하며 서로 앞서기 위해 경쟁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진보는 냉전시대 흑백논리와 권위주의 체제 안에서 투쟁하는 모습을 보인다. 권위주의 체제가 여전하고 냉전 청산의 운동권적 사고에 빠져 상대방을 투쟁 대상으로, 사회를 변혁 대상으로 보는 시각을 견지한다. 반면 보수는 발전주의 담론과 시장주의에 매몰돼 변혁을 거부하며, 상대방을 친북 좌파 이념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이겨내야 한다고 본다.

진보나 보수의 정치적 퇴보는 역설적으로 ‘우리 편’ 만들기에 있다. 우리 편이라는 좁은 의미의 정체성을 강화하다 보면 점점 더 많은 반대 세력을 만들게 된다. 거리의 민주주의가 과잉 대표됐다. ‘다수의 의지를 대변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소수자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는 무질서를 경험했다. 자유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자기편을 설득하기보다는 상대방을 설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집단주의가 사회적 공동체라는 문화자본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통합적이고 넓은 성격의 국가 정체성을 만드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아프리카 속담에 ‘혼자 가는 것보다 함께 가야 멀리 간다’는 말이 있다. 길동무가 있어야 힘이 된다는 말처럼 ‘다시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나라’는 더불어 사는 세상이 됐으면 한다.

김성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