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11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나 핵실험과 같은 고강도 추가 도발은 없었다. 그러나 생일 바로 다음 날 한국을 겨냥한 신형 전술유도무기 시험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참관한 가운데 시도됐다.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따르면 북한 ICBM의 미 본토 타격 능력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지만 한국과 일본, 괌 등에 대한 핵 공격 능력은 확실히 확보했다. 그런데도 한·미 정부 당국의 정교한 대응은 보이지 않는다.
지난 1월 북한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6차 정치국 회의에서 “2022년을 우리 당과 인민에게 특별히 중요하고 의의 깊은 혁명적 대경사의 해”로 빛내자고 선언한 바 있다. 북한이 중시하는 2월 16일 김정일 80주년 생일을 비교적 조용히 넘어감으로써 ‘민족의 최대 명절’이라는 4월 15일 김일성 110주년 생일이 주목됐다. 특히 북한이 지난달 24일 화성-17형 ICBM을 발사해 2018년 4월 이래 지속해온 핵과 미사일 발사 실험 유예(모라토리엄)를 깨면서 추가 도발 가능성이 제기됐다.
그러나 북한은 화성-17형에 김일성 생일을 충분히 기념할 만한 의미를 부여한 바 있다. 지난달 26일 노동신문에 실린 5527자 정론을 통해 김일성·김정일이 시작한 강국건설을 김정은이 마침내 완성했다고 강변했다. 체제 정통성을 백두혈통에서 찾아야 하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던 김정은이 자신의 힘으로 “강위력한 주체탄을 우주만리에 용감히 쏘아 올려” 김일성이 시작한 ‘병진노선’을 마무리했다는 논리다. 연이은 주민들의 찬양 발언과 김정은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생소한 선전·선동용 11분짜리 영상물 등을 통해 김일성 생일까지 화성-17형으로 의미를 부여하려 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주민 생활의 고통에도 북한은 군중을 동원해 화려한 ‘평양 축제’로 김일성 생일을 보냈다. 그 직후 김정은이 직접 참관한 신형 전술유도무기 시험발사를 성공적으로 이행했다고 발표했다. “핵 전투무력을 더 한층 강화하겠다”는 발언도 잊지 않았다. 향후 북한은 도발을 지속할 것으로 예상된다. 핵실험과 각종 전술·전략핵 미사일 발사를 17일 발표처럼 국방력 강화에 따른 계획된 일상적 행위라는 식으로 합리화하며 ‘도발의 일상화’를 고착할 것이다.
한·미 당국은 북한 도발을 억제하지 못했다. 특히 2019년 5월 북한이 전술핵 탑재가 가능한 KN-23을 비롯해 중단거리 미사일 발사 실험을 시작했을 때 사실상 레드라인을 넘었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소형 미사일 발사는 많은 나라들이 하는 실험”이라며 사실상 북한 도발을 용인할 때 문재인정부도 동조했다. 그리고 미국 본토 공격용인 ICBM만 막는 레드라인을 그었다. 조 바이든 행정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북한이 각종 미사일을 쏘는데도 지난 1년여간 대화도 강압도 아닌 ‘전략적 방치’ 태도만 보였다. 문재인정부가 철 지난 종전선언만 외치는데 미국이 적극 나서기에 한계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레드라인을 새로 그을 때다. 한·미는 미국만 아니라 한국을 향한 전술핵 미사일 도발도 포함해 북한이 국제사회가 불법으로 규정한 탄도미사일 발사를 감행할 때 어떻게 대응할지 예상할 수 있게 밝혀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 전략자산의 순환배치, 한·미 연합훈련 복원, 대중 제재 등을 북한의 특정 행동과 연계한 대응 조치로 밝힐 필요가 있다. 레드라인은 단순한 선이 아니라 그 선을 넘었을 때 부과될 상응 조치를 밝힘으로써 억제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가장 시급한 당면 과제는 북한 미사일의 고도화를 막는 것이다. 물론 대화의 문도 계속 열어둬야 할 것이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