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년생 동갑내기인 작곡가 이선영과 작가 한정석은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와 ‘레드북’을 비평과 흥행 모두 성공시키는 연타석 홈런을 날렸다. 특히 ‘레드북’은 남성 서사 중심이었던 국내 뮤지컬계에 여성 서사 붐을 일으키는 계기를 만드는 장외 홈런이었다. 서울 국립정동극장에서 지난 1일 개막한 세 번째 작품 ‘쇼맨-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박소영 연출)는 3연타석 홈런 조짐을 보인다. 두 사람을 지난 6일 이 극장에서 만났다.
“김민섭 작가의 ‘대리사회-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이란 책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히틀러가 카메라 앞에서 연설을 연습하는 등 쇼맨십에 관심이 많았다는 자료를 접한 것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 개인이 사회 안에서 온전히 주체적일 수 없다는 자각이야말로 주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공연에 담고 싶었어요.”(한정석)
‘쇼맨’은 냉소적인 한국계 입양아 수아가 젊은 시절 독재자의 대역배우를 했던 네불라의 화보 촬영을 맡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두 사람 모두 사회적 역할에 충실한 것이 자신의 삶에 충실한 것이라 여기는 쇼맨으로서 공통점을 가진다.
“정동극장이 3년 전 작품을 의뢰하면서 자유롭게 쓸 수 있게 해주셨어요. 그래서 앞선 작품들과 달리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를 쓸 수 있었죠.”(한정석)
“2013년 초연한 ‘여신님이 보고 계셔’와 2017년 초연한 ‘레드북’은 뮤지컬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디벨로핑하는 단계를 거치면서 관객의 피드백을 일부 반영한 것과 달리 이번 작품은 그런 과정 없이 바로 본공연을 올렸어요. 개막 전까지 긴장이 많이 됐죠. 앞선 작품보다 우리 색깔을 많이 드러냈는데,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입니다.”(이선영)
이선영과 한정석은 2008년 뮤지컬 아카데미 ‘불과 얼음’에서 만났다. 당시만 해도 대학에 뮤지컬 창작 수업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 때여서 뮤지컬에 관심 있는 창작자들은 이곳에 모였다. 매주 창작자 파트너를 바꿔 실습하는 수업에서 친해진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뮤지컬에 도전했다. 그렇게 해서 만든 첫 작품이 6·25전쟁 때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 남북한 군인의 이야기를 그린 ‘여신님이 보고 계셔’다. 이어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당시 기준에선 야한 소설을 쓰는 작가 안나와 고지식한 변호사 브라운이 티격태격하며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담은 ‘레드북’을 내놨다.
“선영씨는 최고의 파트너이자 친구입니다. 늦은 시간에도 언제든 전화해서 작품 이야기를 할 수 있죠. 협업을 시작한 직후엔 서로 티격태격했지만 지금은 정말 잘 맞습니다.”(한정석)
“정석씨와 저는 이제 생사를 같이하는 전우라고 생각해요. 제가 비관적인 데 비해 정석씨는 낙관적인 성격이어서 서로 보완해 주는 것 같아요.”(이선영)
한정석은 지난해 ‘레드북’으로 극작가들에게 최고 영예인 차범석희곡상 뮤지컬부문 수상자가 됐다. 이때 받은 상금은 이선영과 나눴다. 한정석은 “뮤지컬 대본은 작곡가와 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선영씨와 수상의 영광을 나누고 싶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에겐 빼놓을 수 없는 동료가 한 명 더 있다. ‘여신님이 보고 계셔’ ‘레드북’(2021년 대극장 버전)에 이어 ‘쇼맨’의 연출을 맡은 박소영이다. 두 사람과 박소영은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난 뒤 지금까지 협업하고 있다.
이선영과 박소영은 작가 장우성과 함께 또 다른 트리오로 활동한다. 세 사람은 2017년부터 ‘선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귀감이 되는 삶’을 산 인물의 어문자료를 토대로 음악극을 만드는 ‘목소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전태일을 소재로 한 ‘태일’과 소록도에서 한센인을 돌본 마리안느 스퇴거와 마가렛 피사렛 수녀의 삶을 그린 ‘섬:1933~2019’을 선보였다. 이선영은 “정석씨와 함께하는 작업이 드라마로서 높은 완성도를 지향한다면 장우성 작가와 작업은 실존 인물인 캐릭터에 집중한다는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선영과 한정석은 네 번째 작품으로 인간보다 먼저 우주여행을 했던 개 라이카에서 모티브를 얻은 ‘라이카 in B612’를 작업 중이다. 지난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연극·창작뮤지컬 대본공모 사업에 선정된 작품이다. 한정석은 “원래 ‘쇼맨’보다 ‘라이카 in B612’의 작업을 먼저 했다”며 “대본 수정과 함께 선영씨의 음악이 더해지며 4분의 3 정도 만든 상태”라고 귀띔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